일제강점기 우리대학의 발자취

▲ ‘공립어의동실업보습학교’가 19 10년 4월 15일에 개교했음을 알리는 『관보(官報)』(제4656호)
우리대학은 1910년 대한제국 시기에 산업혁명에 따라 전국적으로 높아진 실업교육의 열망에 부응하고 대한제국의 순종 황제가 반포한 실업학교령에 기초해 공립어의동실업보습학교로 설립됐다. 서울과학기술대학교에 이르기까지 학제 변경을 거듭하며 끊임없이 발전해왔다. 우리대학은 오랜 시간 동안 대한민국 경제 발전의 핵심인 산업 분야 인재를 육성 배출하는 산실로 기능을 해왔다. 일제강점기 고등교육 시설의 면모가 잘 드러나 있는 것이 특징이다.
뒤이어 어의동공립간이공업학교는 1912년부터 1922년까지 11년 동안 교육을 제공했다. 제 2차 조선교육령에 따라 어의동공립간이공업학교는 어의동공립공업보습학교로 개편됐다. 간이공업학교 시절에는 입학을 위한 최저학력이 존재하지 않았으나, 이 시기부터 보통학교 이상의 학력이 요구됐고, 일본인과의 공학제가 실시됐다. 또한 1923년에는 총면적 117평의 독자 교사를 신축해 교육을 제공했다. 어의동공립공업보습학교의 동향은 당시 동아일보에도 보도되는 등 상당히 주목도가 높았다. 이외에도 졸업자들이 상급학교로 진학하는 추세가 증가해 1926년 오카다 일본 문부성 대신이 방문했을 뿐만 아니라 일본 황족, 외국의 왕이나 황태자가 방문하기도 했다.
어의동공립공업보습학교는 1928년에 이르러 어의동공립공업실수학교로 교명을 변경했다. 당시 『동아일보』에서 ‘보습’이라는 용어가 당시 그다지 호감을 얻지 못하는 상황이었다고 보도됐다. 1930년과 1931년의 학생 모집을 통해 어의동공립공업실수학교 시기에 이르러서는 학교의 학제가 고등보통학교 수준에 준하는 형태로 변화하고 있었다. 재학생들이 1929년 광주학생항일운동에 따른 동맹휴학에 동참해 『동아일보』에 보도된 기록이 있다.
1931년 폐교된 경기도공립사범학교 부지가 있는 아현동으로 이전하며 경성공립직업학교로 개편됐다. 이 개편은 직업교육 성격의 공업교육기관에서 정규 학제로 진입하게 됐다는 점에서 의미를 지닌다. 경성공립직업학교는 을종공업학교로 분류돼 졸업 시 상급학교 진학이 제도적으로 가능했다. SK그룹의 창업주 최종건 前 회장이 이 시기 졸업생이다. 경성공립직업학교는 매년 합격자 발표가 동아일보에 수록될 정도로 식민지 조선에서 높은 위상과 명성을 자랑했다. 또한 졸업생들이 높은 취업률은 물론 상급학교 진학률까지 높게 나타나자 중등교육기관으로서의 직업학교가 전국으로 확산하는 파급효과를 불러왔다.
그 후, 조선총독부는 경성공립직업학교를 성서공업학교로 개편하기로 결정했고, 1944년 경기공립공업학교라는 정식명칭으로 개편됐다. 해방 직후인 1945년 10월 4일 기존의 공업학교를 중학교로 변경한다는 지침에 따라 경기공업중학교라는 명칭을 새로이 갖게 됐고, 11월 23일 미군정청 학무국에서 주최한 조선교육심의회의 결정에 따라 6년제 고등중학교 과정으로 학제를 변경했다. 경기공업중학교는 1951년까지 교육을 제공했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은 2차 세계 대전에서 패배해 무조건 항복을 선언했다. 일본의 패전으로 경성제대 이공학부는 총 3회 졸업생 123명을 배출하고 폐교돼 역사 속으로 사라진다. 광복 후, 100명의 인사들로 구성된 ‘조선교육심의회’가 1945년 11월에 열렸다. 이 의회에서 일제가 설립한 경성제국대학(이하 경성제대) 건물을 활용해 국립 종합대학교 설립이 제안됐고, 이에 1946년 8월 ‘국립 서울대학교 설립에 관한 법령’이 공포돼 같은 해 10월 국립 서울대학교(이하 서울대)가 개교했다. 그 결과 경성제대 이공학부로 사용됐던 공릉 캠퍼스는 서울대학교 공과대학(이하 서울공대)이 1980년까지 사용하게 된다. 서울공대 시절 공릉 캠퍼스는 40여만 평의 대규모 부지로 이뤄졌으나, 우리대학의 전신인 경기공업전문대학이 이전하며 한국전력의 원자력 관련 시설 부지와 신설된 경기기계공고 부지로 분할돼 대지면적은 줄어들게 된다.
여러 나라가 거쳐간 창학관

창학관과 다산관은 지하 통로로 연결된 암수 쌍둥이 건축물로 2002년 5월 31일(금) 등록문화재 제12호로 지정됐다. ‘서울대 구 공과대학 본관과 교사’중 교사에 해당한다. 현재는 정보통신대학 소속 전자IT미디어공학과가 사용한다. 일제강점기에는 경성제국대학 이공학부 교사로 사용됐고, 해방 이후 1980년까지 서울대 공대 전기전자관으로 사용했다. 6.25전쟁 당시에는 미군 사령부 건물로도 사용했다. 1940년대 교육시설의 전형적인 ‘ㅁ’자형 배치가 다산관과 같으며, 현관 내부의 공간구성도 잘 설계돼 있다.
1층에는 학과사무실과 ▲전자IT미디어공학과 학생회실 ▲미화원휴게실 ▲강의실 ▲쉼터 등이 있고, 2층에는 전자공학프로그램 교수 연구실과 해당 교수의 랩실들이 있다. 3층에는 미디어IT공학프로그램 교수 연구실과 해당 교수의 랩실들이 있다. 참고로 창학관 앞 벤치가 있는 정원은 교내에서 청설모가 가장 자주 등장하는 지역이다. 2018년 7월에 서울대 전자공학과 출신인 김정식 대덕전자 회장 겸 해동과학문화재단 이사장의 호를 따 해동정보실이 여러 군데 생겼다. 그중 하나가 창학관 1층 쉼터 맞은편에 생겼다.
우리대학과 역사를 함께해온 다산관
▲1983년 4월 1일 당시 대학본부(현 다산관)에서 개최된 김호근 박사의 총장 취임식
우리대학을 대표하는 건물 중 하나인 다산관은 경성제국대학이 1940년대 초 이공학부를 신설하며 지어진 건물로, 경성제국대학 이공학부의 본관이었다. 1945년 광복 이후 서울공대로 개편된 후에도 1980년대까지 이 건물을 사용했다. 이후 우리대학이 캠퍼스 부지를 넘겨받아 현재에 이른다. 이와 같은 역사성을 인정받아 경성제국대학 이공학부 교사 및 서울공대 전기전자관으로 사용된 창학관과 함께 등록문화재 제12호로 지정됐다.
등록문화재로 지정된 건물이다 보니 재건축이나 리모델링에 제한이 있고, 그로 인해 외벽에 6·25 전쟁 당시의 것으로 보이는 탄흔들이 콘크리트로 메워져 있을 뿐 그대로 남아있다. 다산관의 형상은 학교의 상징으로도 자주 쓰이고 있다. 정문 형태, 학교 로고, 심지어 제 1학생회관 바닥의 색깔과 타일 배치까지 다산관 형태에서 따왔다. 과거 다산관 중앙탑 위에는 시계가 있었다. 학교 연못인 붕어방과 더불어 우리대학의 대표적인 명물로 거론됐지만 2008년 가을 무렵에 ▲시계의 노후화 ▲수리의 난해함 ▲유지비용 등의 문제로 철거됐다.
일제강점기가 생생하게 담긴 대륙관

대륙관은 2008년 2월 28일(목)에 등록문화재 제369호로 지정됐다. 1931년 일본 관동군의 만주 침략 그리고 1941년 일본의 진주만 기습으로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고 일본은 주변국 침략 이후 광산 개발에 눈을 돌리게 된다. 1939년 풍수적으로 보기 드문 길지 불암산 자락에 한반도 광산자원을 반출하기 위한 전문 인력 양성학교인 경성광산전문학교가 들어섰다.
일본 제국이 1943년에 경성광산전문학교를 공릉동으로 이전시키며 지어졌다. 즉, 경성광산전문학교와 경성제국대학 이공학부의 교사가 공존하고 있었다. 중앙에 본관을 두고 그 옆 무도장과 강당이 배치돼 있었다. 1946년의 도면에는 본관 뒤쪽으로 더 많은 공장과 실험실이 즐비하게 들어서 있었음을 알려준다. 일제강점기 이후로는 1946년, 경성광산전문학교가 서울대로 흡수 통합되며 1980년대까지 서울대 공대 5호관으로 사용했다. 현재는 공과대학 소속 건설시스템공학과가 사용하고 있다.
전체적인 디자인은 1940년대 모더니즘 풍자다. 전체 배치는 축과 중심을 강조하는 고전주의에 속하며, 특히 본관 중앙의 높은 탑은 세련되면서도 권위적인 분위기를 풍기는데, 일제강점기 전문학교의 위용을 보여주려는 시각 장치라고 볼 수 있다.
‘일제강점기 시절에 설립된 우리대학의 역사를 알고 있는 학생이 몇이나 될까’라는 의문을 시작으로 일제강점기 시절의 우리대학의 역사를 취재하게 됐다. 본지는 110년 이상의 역사를 가지고 있는 학교의 학생으로서 자부심과 역사를 잊지 않는 마음가짐을 토대로 발전 가능성 및 훌륭한 인재로 거듭나 앞으로 더욱 부응할 수 있는 학교를 만들어 나가고자 하는 바람을 담고 있다. 이를 통해 우리대학의 역사를 잘 모르는 학생들에게 역사를 알리는 계기가 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