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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_봄을 기다리며
기사 승인 2021-12-05 19  |  653호 ㅣ 조회수 : 54

봄을 기다리며



  모모코가 박 씨를 따라 처음 조선에 온 날, 항구에 함박눈이 내렸다. 모모코의 고향인 홋카이도 삿포로에서 그랬던 것처럼 부산의 항구에도 많은 눈이 쌓여있었다. 부산에는 눈이 잘 오지 않지만, 예외적으로 그해에는 부산에 많은 눈이 내렸다. 항구 앞 가게에 여기저기 눈을 치우는 사람들이 보였다. 항구가 얼어붙을 정도로 추운 날씨였지만 부산항은 배를 타고 일본에서 조선으로 들어온 사람들로 북적였다. 박 씨는 모모코에게 조선의 광복이 이렇게 많은 사람을 고향으로 불러들였다며 오늘은 잔칫날과 같다고 했다. 모모코는 그의 말을 온전히 이해하진 못했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사방을 향해 몰아치는 칼바람에 모모코는 힘겹게 두 눈을 뜨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1945년 12월의 부산항은 어수선했고 모모코는 그 어수선함을 즐겼다. 그날 모모코는 미사키의 존재를 처음 알게 되었다. 홋카이도 하꼬다데 항구에서 출발해 부산항으로, 또 부산에서 서울로 올라가는 긴 여정에 박 씨는 모모코에게 많은 이야길 들려줬는데, 그중 하나가 미사키의 이야기였다. 미사키는 홋카이도 탄광병원에서 일하던 간호사다. 탄광병원에서 근무하던 미사키는 탄광에 강제로 끌려온 조선인 노동자 김 씨와 눈이 맞았다. 미사키와 김 씨가 몰래 결혼식을 올리고 이곳 조선까지 함께 오게 되었다는 이야길 듣고 모모코는 미사키의 모습을 상상했다. 간호사 일자리를 그만두고 여기까지 오다니 미사키는 대단한 사람일 것 같았다. 모모코의 남편 박 씨는 미사키의 남편인 김 씨와 동향이라 연결고리가 있다며 모모코에게 조선에 가면 미사키를 만나게 해주겠다고 약속했다. 박 씨를 따라 가족들 몰래 일본에서 조선까지 오게 된 모모코의 처지를 생각하면 미사키는 모모코에게 의지가 될 좋은 친구였다. 미사키와 모모코 모두 일본에서 조선으로 사랑을 따라 먼 길을 온 것이다. 일본에서의 모든 인연을 뒤로하고 조선에 올 만큼 그녀들의 사랑은 용감했다.



  모모코는 부산항에서 풍겨오는 낯선 이국땅의 냄새를 맡았다. 처음 맞는 이곳의 겨울바람도 온몸으로 느꼈다. 박 씨는 모모코의 목도리를 코 밑까지 덮어주었다. 모모코는 조금 더 이곳의 공기를 피부로 느끼고 싶어 살짝살짝 목도리를 내려 냄새를 맡고 찬바람을 맞았다. 모모코는 부산항의 공기가 멘타이꼬 (명란젓)처럼 달콤하고 짭짜름하다고 생각했다. 모모코는 공기를 한번 크게 들이마시고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런 모모코의 모습이 귀여운지 박 씨가 모모코의 옷매무새를 고쳐주며 싱긋 웃어 보였다. 박 씨는 오랜만에 맡아보는 고향의 냄새가 엄마의 품처럼 향긋하다고 했다. 배에 탄 사람이 너무 많아 모모코와 박 씨는 한참을 선착장에서 대기해야 했다. 그동안 모모코는 일본에서 박 씨와 함께한 추억을 떠올렸다.


*

  박 씨는 당시(광복 이전) 조선에서 문학을 공부하러 일본 홋카이도로 건너간 유학생이었다. 그가 홋카이도에 있는 모모코의 집에 하숙하게 되며 두 사람은 처음 만났다. 모모코는 그때 고등학교를 막 졸업한 철부지 여학생이었는데 수려한 외모의 박 씨에게 푹 빠지게 되었다. 모모코는 그의 근사한 미소를 보기 위해 그의 방을 훔쳐보곤 했다. 모모코는 박 씨가 다른 남자들과는 다른 부드러운 매력을 지녔다고 생각했다. 그는 신사적이고 지적이면서도 따분하지 않은 사람이었다. 모모코의 완벽한 이상형에 가까웠다. 모모코가 박 씨를 향한 마음을 키워가는 동안 박 씨는 학업에 집중했다. 일본에서 문학을 공부하는 일은 박 씨에게 많은 고민을 안겨주는 작업이었다. 그는 글을 공부하고 시를 쓰는 일이 올바른 일인지 항상 고민했다. 일본에 유학을 왔지만, 고향인 조선 땅에서 자유롭게 글을 공부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모모코는 박 씨의 그런 진지한 성격이 좋았다. 사랑 앞에서도 진중한 태도를 보일 사람이라는 믿음이 갔다. 그래서 모모코는 박 씨를 항상 눈여겨보고 있었다. 어느 날, 박 씨가 함께 글을 공부하던 동료들과 크게 다투고 술에 만취해 집에 돌아왔다. 박 씨답지 않은 행동이었다. 다행히 모모코가 그를 마중 나왔다가 골목에서 발견해 방으로 몰래 숨겨주었다. 덕분에 박 씨는 하숙집에서 쫓겨나지 않았다. 이 일을 계기로 박 씨는 모모코에게 곁을 주었다. 박 씨는 종종 모모코에게 속마음을 털어놓고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조선의 학자로 살고 싶은 자신의 신념과 현실이 자주 부딪힌다는 소릴 했다. 두 사람은 그렇게 함께하는 시간이 많아졌고 함께 나누는 대화도, 웃음도 많아졌다. 두 사람이 사랑에 빠진 건 순식간이었는데, 그건 마치 시간의 마법 같았다. 두 사람이 함께 보낸 그 시간만큼은 어떤 신도 빼앗아갈 수 없었다.



  일본에서 박 씨와 모모코는 함께 홋카이도 근처의 작은 마을을 여행하기도 했다. 그중에서도 눈이 많이 내리던 날 가족들 몰래 떠났던 온천 여행을 모모코는 잊지 못한다. 모모코는 집 입구부터 가득 쌓인 눈을 새벽부터 치우느라 애먹었던 일을 떠올렸다. 모모코는 그날의 모든 것이 좋았다. 간단히 짐을 챙겨 온천으로 훌쩍 떠났던 그 날 모모코는 세상에 박 씨와 단둘이 남은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박 씨는 온천에서 몸을 녹이고 있는 모모코에게 눈사람을 만들어 건네며 장난스럽게 웃었다. 박 씨는 그날 집에 돌아오는 길에 그녀에게 청혼했다. 꽃도 반지도 없었지만, 모모코는 그의 청혼에 응했다. 항상 자신을 행복하게 만들어주는 그를 모모코는 평생 사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가족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하숙생으로 들인 박 씨와 혼인한 모모코를 가족들은 미련하다고 했다. 하지만 모모코의 귀에 가족들의 말은 들리지 않았다. 혼인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조선은 광복을 맞이했고 일본은 패전했다. 그래서 성공하려면 조선으로 가야 한다는 박 씨의 말에 따라 모모코는 1945년 12월 추운 겨울 고향 홋카이도를 떠나 조선으로 향했다. 모모코는 난생처음 해외로 먼 여정을 떠났다. 20년 인생을 통틀어 가장 과감한 선택을 한 것이다. 순전히 사랑 때문이었다. 박 씨와 함께하고 싶은 어린 마음이 모모코를 낯선 이국의 땅으로 이끌었다. 모모코는 온전히 박 씨에게 의지한 채 이곳 조선에서 첫걸음을 뗐다.


*

  모모코에게 일본을 벗어나는 일은 하나의 모험이었다. 모모코는 더욱 박 씨의 등에 찰싹 달라붙어 걸었다. 호기심 반 두려움 반, 모모코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주위를 살폈다. 선착장을 나오니 낯선 언어가 들렸다. 사람들의 시선도 느껴졌다. 추운 겨울이었지만 모모코는 긴장한 탓에 식은땀을 흘렸다.



  항구에서 다시 서울로 가는 길에 박 씨는 모모코에게 앞으로의 계획을 말해주었다. 박 씨는 글을 배우고 싶어 하는 학생들을 위해 작은 학교를 열 것이라고 했다. 집을 따로 구하기 전 얼마간은 시댁에서 지내겠지만 반드시 한 달 내에 집을 구해 신혼살림을 꾸리게 해주겠다는 말도 했다. 모모코는 그런 박 씨가 믿음직스러웠고 의지가 되었다. 항구에서 내려 시댁으로 가는 길은 모모코에게 멀게만 느껴졌다. 긴장한 모모코의 어깨를 다독여주는 박 씨 덕분에 모모코는 큰 실수를 하진 않았다. 항구에서 벗어나 버스를 타고 시댁으로 향할 때 사람들은 하나, 둘 모모코를 보고 숙덕이기 시작했다. 사람들의 시선에 당황한 모모코가 입을 꾹 닫은 채 경직되자 박 씨는 몸으로 그녀를 막아서고 다정하게 웃어주었다. 모모코는 고향에서 이렇게 멀리 떠나온 건 처음이라 긴장감에 몸이 부르르 떨렸다. 어떤 행동을 해야 할지 모르겠고, 사람들과 마주치는 시선에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지 모모코는 알지 못했다. 박 씨는 자연스럽게 모모코를 이끌었고 모모코는 이전에 일본에서 느껴본 적 없는 낯선 이방인의 기분을 느꼈다. 모모코는 일본에 있을 때 만났던 조선 사람들을 떠올렸다. 그들도 이런 기분이었을까.



  모모코와 박 씨는 서울 종로의 시댁에서 한동안 신세를 졌다. 오랜만에 조선으로 돌아온 박 씨가 반가운 시댁 어른들이 매일같이 그를 찾아왔다. 몇몇은 일본인 아내를 얻었다는 걸 알고 박 씨를 불러 꾸짖기도 했다. 시누이와 시어머니는 모모코가 말귀를 알아듣지 못한다고 답답해했고, 알아듣지 못한다고 생각해 대놓고 흉을 보기도 했다. 하지만 모모코는 잘 견뎠다. 박 씨를 믿는 만큼 씩씩하게 살아야겠다고 마음먹었기 때문이다. 스무 살밖에 되지 않은 모모코에게 시댁 식구들은 많은 걸 바라지 않았다. 오히려 외면하고 침묵하는 날이 더 많았다. 모모코는 투명 인간이 된 채 한 달을 살았다. 그렇지만 굳게 마음을 먹었기에 눈물 한 번 흘리지 않았다. 식사할 때 모모코는 시누이와 시어머니가 앉는 작은 식탁에 억지로 끼어 밥을 먹었다. 박 씨는 시아버지와 함께 커다란 상에 여러 반찬을 늘어놓고 따로 식사했다. 손님들이 찾아오는 날이면 그 상에 올라가는 반찬들이 더 많아졌다. 종일 밥을 짓고 빨래를 하고 집을 청소하는 시어머니를 따라다녔지만, 시어머니는 모모코가 보이지 않는 것처럼 행동했다. 모모코는 차마 내놓지 못한 자신의 빨랫감을 들고 혼자 개울가에 갔다가 고꾸라져 창피를 당하기도 했다. 박 씨가 집에 있을 땐 모모코를 챙겨주었지만 주로 일을 알아보기 위해 나가 있는 시간이 더 많았기 때문에, 모모코는 줄곧 혼자 시간을 보냈다.



  눈치를 보는 일에 익숙해져 쾌활했던 모모코의 성격이 소극적으로 바뀌었다. 모모코는 이제 식구들에게 나서서 무얼 해야 하는지 묻지 않았고 호감을 사기 위해 신발을 정돈하지 않았다. 인사를 해도, 웃어 보여도 먼저 도움을 주려고 해도 무시당했기 때문이다. 모모코는 식구들이 그녀를 무시하는 것이 자신이 일본인이기 때문이란 것을 알았다. 그리고 그들의 마음을 바꾸기 어렵다는 것도 알았다. 모모코는 진지하게 자신의 뿌리에 대해 고민하기도 했다. 일본 출신이라는 사실은 바꿀 수 없는 그녀의 뿌리였고, 그녀는 그 사실 때문에 괴로워했다. 사랑을 따라 이곳에 온 어린 신부는 자신을 향한 분노의 화살이 다른 곳으로 꺾일 수 없다는 사실이 너무 매정하게 느껴졌다. 모모코는 일본을 등지고 이곳으로 왔는데, 사람들은 모모코를 일본 그 자체로만 보았다. 이곳의 다른 여인들과 똑같은 여인으로, 어여쁜 새색시로 불리고 싶었던 모모코는 끝끝내 식구들의 마음을 얻지 못하고 그 집을 떠났다.



  한 달 후, 박 씨는 모모코에게 약속한 대로 작은 신혼집을 구했다. 박 씨가 열기로 계획한 소학교에 딸린 방 한 칸이 전부였지만 모모코는 정말 기뻤다. 모모코는 이곳에 와서 드디어 한 발짝 내디딘 것 같은 뿌듯한 기분을 느꼈다. 시댁에서 식구들의 마음을 얻지 못하고 바로 나오게 된 것이 아쉽기는 했지만, 한 달간 무시당했던 그 집에서 드디어 벗어날 수 있어 좋았다. 박 씨가 글을 가르치는 소학교를 열고 난 후, 모모코는 종종 박 씨의 수업을 엿들었다. 낮에는 아이들에게 오후에는 동네 여인들에게 글공부를 가르치는 박 씨가 모모코는 자랑스러웠다. 박 씨는 모모코가 낮에 아이들과 함께 수업을 듣길 권했지만, 모모코는 다른 사람들과 어울릴 용기가 없다며 거절했다. 얇은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안방이 있기에 모모코는 교실에 가지 않아도 방에서 수업을 모두 들을 수 있었다. 또, 아이들과 어울리다 박 씨가 괜히 학부모들의 항의를 받을까 봐 모모코는 사람들이 몰려오는 시간이면 방 안 깊숙이 몸을 피했다.



  그래도 모모코는 조선말이 빠르게 늘었다. 한글을 공부하는 게 점점 재밌어졌고, 박 씨가 수업에 가져오는 문학작품을 읽는 일도 즐거웠다. 그런데 박 씨는 일본에서 공부한 일본 작가들의 작품은 수업에서 다루지 않았다. 주로 광복 전에 발표된 독립의 염원을 담은 시와 독립 이후 쏟아져 나오기 시작한 새로운 작품들을 연관 지어 수업을 진행했다. 처음 모모코와 박 씨가 공통점을 찾은 것이 이시카와 다쿠보쿠의 시를 좋아하는 취향이 같다는 것이었는데, 서울에 온 뒤 박 씨는 모모코에게 더는 이시카와 다쿠보쿠의 시를 들려주지 않았다. 그리고 동료들과도 그의 작품 이야기를 나누지 않았다. 모모코는 박 씨의 변한 모습에 조금 놀랐지만 섭섭함을 직접 표현하진 않았다. 그렇게 모모코의 조선말이 늘어갈 때쯤, 박 씨의 소개로 모모코는 미사키를 만나게 되었다.



  모모코와 비슷한 처지의 미사키도 모모코를 만나길 기다렸던 모양이다. 종로의 작은 다방에서 만나도록 박 씨가 약속을 잡아주었는데 미사키가 모모코의 집으로 오겠다며 약속장소를 바꿨다. 수업을 쉬는 일요일 낮 2시에 모모코와 미사키는 이곳 소학교의 텅 빈 교실에서 처음 만났다. 두 살 차이라지만 모모코보다 성숙한 티가 나는 미사키에게 모모코는 바로 ‘오네상 ’이라는 말이 튀어나올 뻔했다. 한글을 공부하지 않은 미사키 덕에 모모코는 오랜만에 일어로 길게 대화를 나눴다. 박 씨는 자리를 비워주기 위해 밖으로 나섰다. 모모코는 그때 미사키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일본에서 가져온 꽃무늬 치마를 입고 긴 머리카락을 가지런히 늘어뜨린 미사키의 모습은 참 아름다웠다. 일본에서 자주 미인 소리를 들었을 법한 외모였다. 희고 깨끗한 피부, 아래로 쳐진 애교스러운 눈매 그리고 작게 망울진 코에 얇은 입술을 가진 그녀는 긴 생머리가 잘 어울리는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이 동네에서 긴 머리를 하고 색깔이 여럿 섞인 화려한 옷을 입은 여인은 미사키뿐 이었다. 그래서 미사키는 사람들 눈에 더 띄었다. 종종 젊은 처녀들이 양장 옷을 입고 춤을 추러 다니긴 했지만, 미사키처럼 튀어 보이진 않았다. 그들은 무리 지어 다녔고 미사키는 혼자였기 때문이다. 춤추러 다니는 처녀들은 부유한 집의 자제들로 철없는 어린아이로 여겨졌기에 사람들의 큰 관심을 받지 않았다. 하지만 미사키는 달랐다. 엄연히 한 가정의 아내로 며느리로 살기 위해 왔다는 이국의 여인이자, 고개를 숙이고 살아야 하는 일본인이었기 때문이다. 미사키가 자주 입는 화려한 꽃무늬 치마, 풀어헤친 긴 머리카락은 사람들의 시선을 끌었다. 그녀가 지나가면 사람들은 혀를 끌끌 차고 못마땅하게 쳐다보았다. 그녀의 이름을 궁금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지만, 그녀에 관한 소문을 묻는 사람은 넘쳐났다. 그날에도 미사키는 그 꽃무늬 치마를 입고 사람들의 시선을 받으며 모모코를 보러왔다.



  모모코는 미사키의 화려하고 도도한 모습에 매력을 느꼈다. 아름다운 미사키를 여시라고 흉보는 동네 사람들이 이해 가지 않았다. 미사키와 모모코는 같은 동네에 살고 있었다. 모모코가 함께 어울리기 좋겠다고 먼저 말을 걸었더니 미사키는 퉁명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미사키는 시댁에 얹혀살고 있기에 자주 어울려 놀기 어려울 것이라고 했다. 모모코는 얼마 전 자신도 박 씨와 시댁에 살다가 독립했단 이야기를 들려주며 김 씨에게 말해 독립을 해보는 건 어떠냐고 물었더니, 도도하던 미사키의 표정이 순식간에 일그러지며 얼굴이 붉어졌다. 한동안 머뭇거리던 미사키가 어렵게 입을 뗐다.



  서울에 김 씨를 따라와 보니 시댁에 시부모님과 함께 본처인 장 씨가 살고 있었다는 미사키의 이야기를 들은 모모코는 너무 놀라 미사키의 손을 덥석 잡았다. 미사키도 모모코의 손을 꼭 잡으며 이야길 이어갔다. 본처인 장 씨가 미사키를 내보내라고 소리치는 것을 김 씨가 겨우 말려 시댁에 다 같이 얹혀살게 되었다고 했다.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 모모코는 눈물이 핑 돌았다. 미사키는 일본에서 탄광 간호사로 일하며 돈도 벌고 경력도 쌓았지만 이제 시댁에서 할 줄 아는 것 하나 없이 갇혀 지내다시피 생활해 스스로가 쓸모없는 존재로 느껴진다고 했다. 모모코가 박 씨의 한글 교실에 와서 조선말부터 배워보는 게 어떠냐고, 조심스럽게 말을 꺼내 봤는데 미사키는 또 고개를 저으며 거절했다. 본처와 미사키 사이를 견디지 못하고 김 씨는 매번 밖으로 돈다고 했다. 그러다 이젠 노름에 빠져 김 씨가 제정신이 아니라고 했다. 여러모로 곤란한 처지에 빠진 미사키가 가여워 모모코는 그 교실에서 몇 번이고 미사키를 위한 일이 없을까 고민했다. 그래도 당장 좋은 수가 떠오르지 않았다. 그렇게 미사키를 돌려보내고 모모코는 박 씨에게 미사키의 이야기를 전했다. 그런데 박 씨는 “그렇구나, 김 씨가 잘못했네.”라고 대꾸할 뿐이었다. 큰 동정을 하지도 않았고 어떤 도움을 주기 위해 나서지도 않았다. 오히려 이곳에선 흔한 일이라는 식으로 말끝을 흐렸다. 모모코는 그런 박 씨의 모습이 낯설게 느껴졌다.


*

  다음 날에도 모모코는 미사키를 만났다. 모모코는 이곳에서 처음으로 말이 잘 통하는 친구를 얻었다고 생각해서 종종 그녀와 만나기로 했다. 긴 생머리를 늘어뜨리며 우아하게 걸어오는 미사키를 보고 모모코는 오늘도 그녀가 참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녀를 사랑해주지 않는 김 씨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광장에서 만난 미사키와 모모코는 일본인 주인이 운영하는 미도리야 제과점에 들르기로 했다. 모모코는 마음에 드는 빵을 구매하기 위해 동전 몇 개를 전중 에 넣어 갔다. 미사키는 돈을 가져오지 않았다. 모모코는 미사키와 이렇게 거리를 걷는 것이 좋았다. 오랜만에 친구와 어울리는 기분이 들어 설렜다. 하지만 미사키는 약간은 퉁명스러운 얼굴로 그녀를 대했다. 모모코는 개의치 않고 그녀를 데리고 이곳저곳을 다녔다. 다음에는 또 어딜 가보자며 미사키의 어깨를 쿡쿡 찔렀다. 미사키는 별다른 반응 없이 애매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모모코와 미사키가 미도리야 제과점 앞에 도착했을 때, 가게는 크게 휴업 중이라는 푯말이 세워진 채 닫혀있었다. 먼 길을 걸어온 모모코와 미사키는 실망스러운 감정을 감추지 못했다. 거의 한 시간을 넘게 걸어온 탓에 배도 고팠다. 모모코가 호기심 어린 얼굴로 주변 식당을 가리키며 국수를 사 먹자고 미사키에게 제안했다. 미사키는 내키지 않는 눈치였지만 배가 고픈지 제안을 받아들였다. 두 사람은 발걸음을 돌려 근처 장마당의 허름한 국숫집으로 향했다. 국숫집에는 모모코의 어머니뻘인 사장님이 혼자 손님들을 응대하고 있었다. 모모코와 미사키가 국숫집 안으로 들어가려고 하는데 가게 안에서 큰 소리가 들렸다.



“일본 사람은 안 쓴다니까!”

“집에서 쫓겨났습니다. 사장님 한 번만…”

“아니, 글쎄 싫다니깐! 시댁에서 쫓아냈으면 거기 가서 밥을 빌던지 하지. 어딜”

“돈도 주지 마세요. 국수 한 그릇만 줘도‥ 그래도 좋습니다.”

“아이고, 이년이 손님 다 내쫓네! 으잉? 썩 꺼지라니까!”



  열여덟쯤 되어 보이는 앳된 얼굴의 여자아이가 국숫집에서 쫓겨났다. 울먹이며 가게를 나오는 아이와 눈이 마주친 미사키와 모모코는 그대로 굳어버렸다. 그때 가게 안에서 들려오는 손님의 한 소리를 듣고 세 명의 일본인 여인은 머리를 쭈뼛 세우게 되었다.



“에잇, 밥맛 떨어지게! 일본 년이 어딜 돌아다녀?”



  모모코와 미사키는 국수 가게를 그대로 등지고 멀리 도망치듯 빠르게 걸었다. 두 사람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길을 걸었다. 등 뒤에서 여자아이가 흐느끼는 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미사키와 모모코는 뒤를 돌아보지 않고 묵묵히 앞을 보고 걸었다. 세 여인은 비슷한 모멸감을 느꼈다. 하지만 이에 대해 뭐라 말하는 여인은 없었다. 정말 긴 침묵이 흘렀다. 입을 앙다문 모모코와 미사키는 서로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서로의 마음도 정확히 알지 못했다. 하지만 세 여인은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결국 모모코는 미사키를 이끌고 다시 동네로 돌아갔다. 배가 고픈 것보다 창피를 당하기 싫은 마음이 더 컸기 때문일까. 모모코는 다시 그 먼 길을 돌아 집까지 미사키를 데리고 갔다. 박 씨는 집에 없었다. 모모코는 미사키를 안방으로 안내했다. 미사키는 쭈뼛대며 안방 벽에 기대어 앉았다. 모모코는 방에 불을 켜고 그 옆에 앉았다. 그때 미사키의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크게 났다. 둘은 눈을 마주치고 푸-하하 웃었다.



“미사키, 간단하게 점심 먹고 갈래?”



  모모코가 미사키에게 물었다. 미사키가 고개를 끄덕였다. 모모코는 박 씨가 해 먹었던 간단한 점심거리를 생각했다. 그리곤 방안 깊숙이 숨겨져 있던 막걸리 한 병을 꺼내왔다. 미사키는 막걸리가 무엇인지 모르는 눈치였다. 모모코는 막걸리가 단 음료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박 씨가 종종 그랬던 것처럼 남아있던 찬밥을 막걸리에 한 사발 말아 미사키에게 건넸다. 배가 고팠던 탓에 모모코와 미사키는 막걸리 밥을 순식간에 먹어 치웠다. 막걸리에 말은 밥알은 목구멍을 타고 후루룩 재빠르게 넘어갔다. 발효된 쌀 특유의 알코올 향이 났지만 두 사람은 그런 걸 눈치챌 새도 없이 밥을 해치웠다. 모모코는 달짝지근한 막걸리 밥이 꼭 일본 간식 당고 같다고 생각했다. 막걸리 밥을 한 그릇 모두 해치운 두 사람은 술기운에 잠이 몰려왔다. 그래서 스르륵 서로의 어깨에 기대어 잠을 잤다. 두 시간을 넘게 걷고 술에 밥을 말아 먹었으니 노곤, 노곤 잠이 오는 게 당연했다. 박 씨가 집에 돌아왔을 때 이미 모모코와 미사키의 두 뺨은 발그레하게 달아올라 있었다.



  박 씨가 모모코를 흔들어 깨워봤지만, 모모코는 코까지 골며 곯아떨어졌다. 뉘엿뉘엿 해가 지고 있는 오후였다. 박 씨는 잠시 고민하더니 미사키만 따로 깨워 밖으로 데리고 나온 후 찬물을 한 대접 마시게 했다. 박 씨가 미사키에게 혼자서 집에 갈 수 있느냐고 물었더니 미사키는 멀쩡하다고 대꾸하며 혼자 대문을 나섰다. 박 씨는 비틀비틀 위태롭게 걸어가는 미사키를 바라보며 김 씨가 그녀를 꾸짖으면 어쩌나 걱정되었다. 하지만 함부로 남의 부인을 댁까지 바래다주기에도 망설여졌다. 박 씨는 미사키를 보낸 뒤 모모코 옆에 가 누웠다. 박 씨는 걱정이 많아 밤잠을 설치곤 했던 모모코가 오랜만에 침까지 흘리며 단잠에 빠진 모습이 안쓰러우면서도 예뻐 보였다. 박 씨가 모모코를 뒤에서 안으려고 하자 모모코는 잠결에 칭얼거리며 그의 품에서 빠져나왔다. 박 씨는 잠에 깊게 빠진 모모코의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마냥 어린아이 같던 홋카이도에서의 모모코가 아니었다. 그녀의 감은 두 눈에서 어딘지 모를 그리움과 허전함이 느껴졌다. 일본에 있을 때보다 야윈 것 같기도 했다. 박 씨는 생각했다. 내가 고향에 돌아오는 일이 그녀에겐 고향을 떠나는 일이었구나. 우리 모모코 어른스러워졌네. 우리 모모코, 나의 모모코…. 그 밤, 모모코의 곁에서 박 씨는 쉽게 잠들지 못했다. 모모코에게서 풍기는 술 냄새를 맡으며 그는 그녀가 앞으로 이곳에서 겪어야 하는 수많은 일을 생각했다. 처음 조선에 가자고 모모코에게 말했을 때는 자신감이 넘쳤는데, 박 씨는 이제 걱정이 앞섰다. 미안한 마음에 스스로 자책하는 일도 많았다. 일본에 있을 모모코의 가족과 모모코의 동네와 모모코의 동무들을 떠올렸다. 박 씨는 자기만 믿으라고 모모코에게 당차게 말했던 과거의 자신이 지금과는 다른 사람처럼 느껴졌다. 가까워 보이지만 사실 저 멀리 떠 있는 달처럼 이제는 가 닿을 수 없는 과거의 자신이 멀게만 느껴졌다.



  박 씨는 빈 병을 마당으로 옮겨놓고, 밤하늘을 한동안 바라본 후에야 그녀의 곁에서 잠들 수 있었다. 그날 밤, 하늘에는 큰개자리 별자리가 떴다. 사람이 맨눈으로 볼 수 있는 가장 밝은 별자리였다. 일본에서 조선의 해방 소식을 들었을 때 박 씨는 오늘과 같은 환하게 빛나는 별자리를 본 적이 있다. 그때 박 씨는 캄캄한 하늘에 혼자 환하게 켜진 그 별빛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광복을 맞이한 조선은 저 별처럼 환하게 빛날 곳이라고. 그곳에서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그래서 모모코를 데리고 이곳, 조선에 왔다. 하지만 한 사람의 인생을 책임지는 일은 고단했다. 그날 밤, 박 씨는 일본에서 가족들과 화목하게 밥을 먹는 모모코의 꿈을 꾸었다. 모모코와 미사키는 추운 그 겨울밤 꿈속에서 같은 생각을 했다. ‘얼른 겨울이 가고 봄이 오면 좋겠다‥’고. 고향을 떠나, 조선에 덩그러니 떨어진 모모코와 미사키는 봄을 기다리며 그 추운 겨울 단잠에 빠졌다. 술기운에 지나간 밤의 시간은 달콤했다. 그녀들은 봄이 오길 기다리며 맘속으로 시간을 세었다. 하나, 둘, 셋! 넷, 둘, 하나‥. 하지만 아무리 시간을 세어도 봄은 오지 않았다.



  그해 1월, 추위에 벌벌 떨던 김 씨네 감나무는 김 씨가 내려친 도끼에 무참히 베였다. 그 나무에 목을 매 자살한 미사키 때문이었다. 후에 소문으로, 김 씨네 본처와 미사키가 싸움이 났는데 가족 모두가 본처를 감싸고 돌았고, 미사키는 김 씨가 보는 앞에서 본처에게 뺨을 연달아 맞았다는 이야기가 돌았다. 봄이 오길 기다리지 못하고 미사키는 생을 마감했다. 그녀의 시간은 봄으로 건너가지 못한 채 그렇게 영영 겨울에 머물렀다. 미사키의 죽음을 목도한 모모코도 한참을 그 겨울 속에서 살았다. 마을 사람들은 미사키의 죽음을 쉽게 잊었다. 그리고 봄이 왔을 때, 온 동네의 벚나무는 무참히 살해되었다. 모모코와 미사키의 시간도 함께 사라졌다. 봄이 오길 다리며‥ 미사키가 감나무에 목을 매달은 그날, 모모코는 벚꽃이 화려하게 수 놓인 치마를 입었다. 그 치마는 모모코가 고향을 떠날 때 엄마가 해준 고운 비단실의 옷이었다. 미사키가 그렇게 떠나고, 그 예쁜 치마를 모모코는 다신 입지 않았다. 그렇게 모모코는 미사키를 잃고 오지 않을 봄을 기다리며 꾸역꾸역 살았다. 생의 한가운데가 텅 비어버린 시간 속에서 모모코와 미사키는 더 이상 만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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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오네상’은 일본어로 친언니 혹은 친한 언니를 부를 때 쓰는 말이다.



ii 주머니 속을 일컫는 말.



iii 쌀가루나 밀가루에 따뜻한 물을 붓고 반죽해 삶거나 찐 후 경단처럼 둥글게 빚어 꼬지에 꽂은 후 달달한 양념을 발라 먹는 일본 전통 화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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