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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우리가 비로소 원이 될 때
박서연 ㅣ 기사 승인 2022-12-06 09  |  668호 ㅣ 조회수 : 309

우리가 비로소 원이 될 때



 어떤 표정은 뒷모습만으로 읽힌다.



 불규칙적으로 들썩이는 어깨의 각도라던가, 천천히 곡선을 그리며 위아래로 끄덕이는 머리, 아니면 허공으로 흩날리는 미세한 머리카락의 움직임 같은 것들. 그들의 얼굴만을 마주해서는 결코 내가 알 수 없는 것들이다.



 내가 사람들의 얼굴을 읽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은 어느새 오래전의 일이 되었다. 어느 순간부터 사람들의 얼굴을 오래 쳐다볼 수가 없었다. 눈코입의 위치와 생김새가 어딘가 이질적으로 느껴져 제대로 얼굴을 마주하기가 힘들었다. 물을 잔뜩 먹인 하얀색 물감을 여러 겹 덧칠한 듯 흐릿한 형태만 겨우 인식할 수 있었고, 가족과 친구들의 얼굴을 기억하지 못해 애를 먹는 순간들이 많아져 갔다.



 내가 기억도 하지 못할 정도로 아주 어릴 적, 큰 사고가 있었다고 했다. 한밤중에 엄마는 머리에서 피를 흘리는 나를 안고 뛰어서 응급실로 향했다. 작은 내 머리에 무시무시한 장비들을 달고서 어려운 이름의 검사들이 진행되었고, 의사는 한참 차트를 뒤적거리다가 차가운 목소리로 내 뇌에 문제가 생겼다고 말했다. 나는 여러 번의 목숨을 건 수술을 거쳐야만 했다. 죽음을 가장 가까이에 두고서 결국 난 살아남았지만, 긴 수술의 후유증은 내가 사랑하는 이들의 얼굴을 앗아갔다.



 이전에는 어떻게 사람들을 대했나 싶을 정도로 익숙한 줄로만 알았던 얼굴들은 서서히 기억의 수평선 너머로 사라져갔고, 더는 사람의 얼굴을 앎과 모름으로 판단하는 것이 불가능해졌다. 증상이 심한 날에는 깨진 거울을 통해 보는 것처럼 눈코입이 조각조각 깨져 보이기도 하였다. 조금 전까지 눈앞에 서 있던 이가 어떻게 생겼는지, 웃고 있었는지 울고 있었는지, 찰나의 표정조차도 떠올릴 수 없게 되었을 때, 나는 내가 다른 사람들과 다르다는 사실을 인정해야만 했다.



 사람들의 얼굴을 알아볼 수 없게 되고 난 후, 이름을 부를 수 있는 사람들의 수는 점점 줄어 들어갔다. 친구들을 만나는 날보다 방안에서 혼자 시간을 보내는 날들이 훨씬 많아졌다. 내가 그들을 알아보지 못했다가 괜히 자신을 무시한다고 오해받느니, 차라리 아무도 만나지 않는 편이 나았다. 그렇게 좋아하던 영화나 드라마를 볼 수도 없었다. 화면을 가득 메운 요란한 색깔의 빛들이 어지럽게 흩어지고 부서지는 과정을 반복해서 보다 보면 십 분도 채 안 돼서 눈이 아파 왔다.



 그렇게 텅 비어버린 시간은 라디오를 듣거나 책을 읽으며 채워나갔다. 내가 만날 수 없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글자로 읽고 소리로 들었다.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다 보면, 세상 사람들은 모두 사랑을 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다들 사랑에 행복해하고, 슬퍼하고, 아파하고, 분노하기도 했다. 덕분에 다양한 감정을 알 수 있었지만, 여전히 사랑은 내가 알 수 없는 무언가였다. 외로움을 자처한 그 기나긴 시간 동안 내가 배운 것은 사람들은 외롭지 않기 위해서 사랑을 하면서, 결국 사랑 때문에 다시 외로워진다는 사실이었다. 사람들은 상처받을 걸 알면서도 왜 그렇게 사랑을 좇을까? 사람을 알고 기억하는 것이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인 내게 사랑 같은 건 사치스러운 감정인 것만 같았다.



 나는 사람들의 얼굴을 잊은 대신 그를 제외한 모든 것을 기억하기 위해 꽤 오랫동안 애를 썼다. 말투와 목소리, 옷차림, 미세한 냄새까지도. 그렇게 나는 점차 사람들을 기억하는 나만의 방법을 만들어갔다. 그들에게 가까이 다가서면, 저마다의 향기를 느낄 수 있었다. 그들의 향기를 맡았을 때 머릿속으로 그려지는 색깔과 연결지어 기억하는 것을 연습했다. 어떤 이에게서는 따뜻한 노란빛의 향이 나고, 또 다른 이에게서는 차가운 보랏빛의 향이 났다.



 그리고 영은 내가 첫 번째로 기억하는 향이었다.



 영을 만난 것은 열여덟 늦봄, 꽃은 하나둘 지고 푸르른 녹음이 우거지기 시작하던 어느 날이었다. 그즈음 나는 병세가 다시 도져 병원 신세를 지는 날들이 길어지고 있었다. 그날도 햇살이 좋아 병원 앞 벤치에 앉아 지나가는 사람들의 발걸음을 세고 있었다. 불규칙적으로 지면에 쏟아지는 사람들의 발걸음을 바라보다가 문득 하나의 발걸음이 눈에 들어왔다. 병원 앞 커다란 느티나무 앞에서 서성거리던 하얀 운동화. 그 애의 발걸음은 꼭 바람에 천천히 흔들리는 나뭇잎 같았다. 한참을 거닐던 발걸음은 어느새 내 앞까지 와 멈춰섰다. 그렇게 영을 만났다.



 영에게서는 초여름의 싱그러운 풀냄새가 났다. 영의 얼굴을 알 수는 없었지만, 머릿속으로 영을 떠올릴 때면 언제나 영의 얼굴로는 절대 읽을 수 없는, 나만 볼 수 있는 표정이 있었다.



 영과 함께 보낸 여름 동안 쉽게 쓰인 마음은 단 한 톨도 없었다.



 나는 매일 아침 일기예보를 보며 바람이 불지 않기를 간절히 바랐다. 바람이 불면 사방에서 온갖 냄새들이 한데 뒤섞여 영의 냄새를 찾을 수가 없기 때문이었다. 바람 한 점 불지 않는 무더운 한여름 날의 날씨를 가장 좋아한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특히 비라도 오는 날이면, 지구를 떠도는 모든 얼룩진 냄새가 가라앉아 정돈된 비 냄새만 코끝에 맴도는 것이 좋았다.



 그렇게 바람이 많이 불지 않는 날이면 함께 병원 근처 숲으로 산책을 갔다. 어떤 날에는 갑자기 소나기가 내려 숲의 입구까지만 걸어갔다가 돌아온 적도 있고, 어떤 날에는 네잎 클로버를 찾아 종일 숲속을 함께 헤매기도 하였다. 하늘이 맑은 날엔 숲에서 가장 크고 오래된 나무 옆에 어깨를 맞대고 앉아 해지는 저녁 하늘을 멍하니 바라보기도 했다.



 우린 이어폰을 나눠 끼고 음악을 듣고, 계절의 사진을 찍고, 책을 읽고, 그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기도 하였다. 영과 나누는 모든 대화가 좋았다. 랑아, 라고 내 이름을 부르는 영의 목소리도 좋았다. 우린 한참 대화를 나누다가 어느새 해가 지고 밤이 되면, 밤하늘을 보며 별자리를 찾기도 하였다. 나의 여름은 영과의 순간들로 가득 채워졌고, 영과 함께한 여름은 나의 행복이 되었다.



 행복의 순간들이 영원히 계속될 수는 없는 걸까?



 어떤 새벽에는 영원을 뱉으며 잠에서 깨어났다. 무슨 꿈을 꾸었는지는 기억할 수 없지만, 아마 난 꿈속에서 영원을 쫓고 있었을 것이다. 꿈의 마지막에서 깨어나는 순간까지도.



 언젠가 영과 바닷가를 걸으며 영원에 관한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쉴새 없이 파도가 밀려오고, 다시 밀려 나가는 것을 바라보며 나는 영에게 세상에 영원한 것이란 아무것도 없는 것 같아 슬프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왜 다들 영원을 바랄까, 라는 물음과 함께. 그 말에 영은 영원한 것은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많은 이들이 영원을 약속하는 이유는, 사랑을 믿기 때문이라고 대답했다. 사랑이 영원한 것이 아니라, 사랑을 믿는 마음이 영원한 것이라고 했다.



 “언젠가 넌 반드시 내 말을 다시 떠올리게 될 거야.”



 그 말을 하는 영은 꼭 금방이라도 떠날 사람 같았다. 담담한 줄로만 알았던 영의 목소리에는 옅은 슬픔이 묻어있었다. 나도 영을 생각하면 한없이 슬퍼졌지만, 그래도 그 순간만큼은 우리의 영원을 믿고 싶었다.



 낡은 필름카메라로 서로의 얼굴을 담으며 영은 말했다. 우리의 찰나를 영원히 담아두자고. 영은 필름을 사는 일이 꼭 시간을 사는 일 같다고 했다. 영이 쓰는 오래된 필름은 1999년까지밖에 날짜가 입력되지 않는 필름이었다. 영은 이 필름 사진 속에 우리의 시간을 영원히 기록해두자고 했다. 흐린 하늘과 파란 여름 바다를 배경으로 우리 둘의 모습을 찍은 사진 하단부에 작은 주홍빛 숫자가 입력되었다. 「1999년 12월 31일」. 실제로는 서로에게 우리가 존재하지 않았을 시간, 서로를 만나지도, 알지도 못했을 시간이었지만, 나는 오히려 그 점이 마음에 들었다. 시간의 틈새를 벌려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던, 우리만 아는 시간을 새로 적어 넣은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영을 사랑했지만 내 마음속 어딘가에는 텅 비어버린 공간이 있었다. 그리고 영과 함께 하는 시간이 길어지고 영에 대한 마음이 커질수록, 그 빈 공간은 점차 슬픔으로 채워졌다.



 하루는 바람이 많이 불지 않아 영과 함께 숲으로 갔다. 여느 때와 같이 영과 발을 맞춰 숲길을 걷고, 길가에 핀 꽃의 이름을 아무렇게나 대기도 하며. 시원한 나무 그늘에 자리를 잡고 앉아 영의 모습을 그림으로 그려주었다. 얼굴은 언제나 미완성인 채로 끝날 수밖에 없는 그림이었지만, 내 모습을 사진에 담아준 영처럼 나도 영의 모습을 그림에 담아주고 싶었다. 나에게만 보이는 영의 모습을.



 내 그림은 받아 든 영은 내게 고맙다고 말했다. 영의 표정이 어땠는지는 모르겠지만, 목소리에는 미소가 띄워져 있었다. 얼굴을 그려주지 못하는 것에 대해 영은 내게 미안해하지 말라고 말했다.



 “어떤 모습으로 나를 보든, 랑이 네가 나를 기억해주는 게 좋아.”



 영은 언제나 내게 한없이 따스한 사람이었다. 광막하고 캄캄한 우주라도 어딘가에 영이 있을 것이라는 믿음으로 어두운 날들을 버틸 수 있었다. 영은 자신의 사랑을 태워 내 우주를 밝혀주는 항성 같은 존재였다.



 그날은 유난히 노을이 붉은 날이었다. 해가 지기 시작할 때쯤 우리는 노을이 가장 잘 예쁘게 보이는 자리에 앉았다. 온 세상이 불빛에 서서히 잠기는 것을 바라보며 영은 잠시 다른 생각에 빠진 듯했다. 나는 길게 그림자가 드리운 영의 뒷모습을 잠자코 바라보고 있었다.



 “랑아, 만약에 말이야.”



 대뜸 영이 운을 뗐다.



 “화성에서 노을을 본다면, 땅도 하늘도 전부 붉은색으로 물들어서 보일까?”



 영은 덤덤한 목소리로 말했다. 우린 서로에게 종종 엉뚱한 질문을 던지고는 했기에, 그리 놀랄 일은 아니었다. 영의 물음에 나는 언젠가 책에서 읽었던 내용을 떠올려 답했다.



 “아니, 화성에는 푸른색 노을이 진대. 대기에 뿌연 먼지가 너무 많아서.”



 신기하지, 라고 덧붙이려다가 문득 화성의 노을이 영과 나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이 보는 나와 내가 보는 영 사이에 존재하는 알 수 없는 간극이 너무나도 커서, 영을 바라보는 내 눈에 매캐한 먼지가 너무나도 짙게 끼어있어서, 영과 나 사이에는 거대한 푸른색 노을이 지고 있었다. 영을 알고 난 후로 영은 언제나 나의 가장 가까운 곳에서 함께했지만, 그와 동시에 거리를 가늠할 수도 없을 만큼 저 멀리 있었다. 영은 그런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말없이 웃기만 할 뿐이었다.



 그날 영은 어떤 표정으로 웃고 있었을까.



 나는 영의 산들바람처럼 흩날리는 웃음소리를 안다. 오른쪽 앞코가 약간 더 닳아 있는 하얀 운동화와 항상 메고 다니는 왼쪽 가방끈에 달린 작은 강아지 배지를 안다. 그 애가 기분이 좋을 때는 한쪽 어깨가 다른 쪽보다 약간 더 올라가 있다는 것도, 둘이서 대화를 하다가 괜스레 말꼬리를 흐리는 버릇이 있다는 것도, 쑥스러울 때는 푸스스-,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는다는 것도, 영에 관한 것이라면 하나하나 다 나열해서 책을 엮을 수 있을 정도로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딱 한 가지, 영의 얼굴은 알지 못했다. 나를 바라볼 때 어떤 눈빛을 하고 있는지, 슬픈 영화를 보고 눈물을 흘릴 때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길가에 핀 이름 모를 작은 꽃을 보고 감탄하며 사진을 찍을 때의 표정은 어떤지, 나는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 그런 내가 어떻게 너를 다 안다고 할 수 있으며, 감히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



 영은 몰랐겠지만, 우리 사이에는 언제나 슬픈 푸른빛의 얼굴을 한 노을이 지고 있었다.



 어떤 날에는 영의 향기가 희미하게 느껴져서 덜컥 불안한 마음이 든 적도 있었다. 사람이 많은 곳에 함께 갔다가 하마터면 영을 놓쳐버릴 뻔했기 때문이었다. 다 똑같이 흐릿한 얼굴들이 혼잡하게 뒤얽히며 거리를 이리저리 다니는 것을 보고 깨질듯한 두통과 어지러움을 느꼈다. 이곳에서 영을 잃어버린다면 절대 찾을 수 없을 것 같았다. 어디선가 내 팔을 덥석 잡는 손길에 소스라치게 놀랐지만, 이내 그가 영이라는 것을 알고 안도했다.



 “네가 날 못 찾아도 내가 언제나 널 먼저 찾을게.”



 영은 날 안심시키려 그렇게 말했지만 나는 두려웠다. 영만큼은 꼭 기억하고 있다고 믿었는데, 시간이 흐를수록 영마저도 내게서 잊히는 것 같아서. 이대로 점점 잊히다가 언젠가는 아예 영을 모르게 될까 봐 겁이 났다. 내가 누군가의 얼굴을 알아볼 수 없다는 사실이 이렇게나 비참하게 느껴진 적이 없었다. 스스로가 너무나도 원망스러웠다.



 내가 아무리 영의 얼굴을 떠올리려 애써도 머릿속으로 그려지는 것은 흐릿한 윤곽뿐이었다. 그럴 때마다 갑자기 영이 내게서 영영 사라질 것처럼 느껴졌다. 내 앞에서 걷는 영의 뒷모습을 볼 때마다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다. 쏟아지려는 눈물을 참으며 영의 뒷모습을 안았다. 영도 몸을 돌려 가만히 나를 안아주었다. 나의 슬픔을 굳이 말하지 않아도 영은 이미 다 알고 있는 듯했다.



 “미안해”



 나의 말에 영은 말없이 내 손을 잡아 자신의 쪽으로 가져가고는, 나의 손바닥에 자신의 검지로 천천히 작은 원을 그리며 말했다.



 “이 원을 우주라고 생각하자. 언젠가 네가 날 알아보지 못하게 되더라도, 우리가 영영 멀어지게 되더라도, 우린 언제나 같은 우주 안에 있는 거야. 그 사실을 잊지 마.”



 영의 얼굴을 어떻게든 기억하고 싶었다. 조심스럽게 영의 얼굴에 내 손을 가져다 댔다. 영의 뺨은 따뜻했다. 내 손이 지나치게 차가웠던 탓도 있을 것이다. 천천히 영의 이마, 눈, 코, 입에 내 손가락이 닿았다. 이 감각을 잊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영의 이마를 덮은 머리카락이 내 손가락을 간질였다. 영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자 영의 향기가 더욱 짙어졌다. 영은 긴 속눈썹을 가지고 있었다. 영의 코는 반듯하게 뻗어있었고, 입술은 부드러웠다. 한참을 영의 얼굴을 만지작거리던 내 손바닥이 다시 영의 뺨을 감쌌을 때, 축축한 기운이 느껴졌다. 나는 영이 울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내 눈에서도 이미 눈물이 흐르고 있었으니까. 우린 굳이 무슨 말을 하려 하지 않았다. 그저 가만히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쩌면 나는 이때부터 영과의 작별을 준비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코끝이 시려오던 어느 흐린 늦가을날, 영은 지구를 떠났고, 나는 그렇게 영과 작별했다. 영에게는 몇 년째 앓고 있던 심장병이 있었다. 나는 크게 놀라지도, 두려워하지도 않았다. 이미 정해져 있던 결말이었을 테니까. 영도 내가 힘들어하는 것을 원하진 않을 것이다. 하지만 생각보다 덤덤한 작별은 쉽지 않았다. 나는 계속해서 무너져내리려는 걸 겨우 다잡았다.



 어째서인지 작별은 이별보다 더 슬프게 들렸다. 이별이 잠시뿐인 헤어짐이라면, 작별은 정말 다시는 볼 수 없을 때 건네는 최후의 인사처럼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영이 내게 마지막으로 건넨 작별 인사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계속 마음속에 잡아두고만 있었다. 영이 언젠가 했던 말처럼, 우리가 같은 우주 안에 있다는 사실만은 분명한데, 여전히 닿을 수 없이 한참 멀게만 느껴졌다. 나는 영이 지구로부터 몇억 광년은 떨어진 어느 작은 별에 도착했을 것이라고 믿기로 했다. 그 별에서부터 영이 보낸 빛이 나에게 도착하기까지 시간이 좀 걸릴 뿐.



 영이 좋아하던 노래를 오랜만에 꺼내 들었다. 영과 함께 해 질 무렵의 숲에 앉아 하늘을 바라보며 몇 번이고 듣던 노래였다. 허공을 감싸는 잔잔한 기타 소리가 나를 빈틈없이 감싸는 기분이 들었다. 눈을 감은 채 노래를 음미했다. 나는 이 노래의 도입부 가사를 가장 좋아했다.



 삶이 원이라면 사랑은 어떤 모양일까?



 사랑은 도대체 어떤 모양이고,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 걸까. 영은 자신도 그 답은 알 수 없다고 말했다. 로맨스 영화에서는 두 주인공이 사랑에 빠질 때 짓는 표정이 사랑의 모양일까. 만약 그렇다면 나는 영원히 사랑의 모양을 모른 채로 살아갈 텐데, 그런 생각을 하자 조금 울적해졌다.



  삶이 원이라면 사랑은 어떤 모양일까?

  나는 이 원을 떠날 거야

  삶이 원이라면 죽음은 어떤 모양일까?

  또 다른 원을 찾아보자

  끝없이 순환하는 원을*



 가사를 곱씹다가 문득 정신이 들었다. 삶이 원이라면 죽음은 어떤 모양일까. 죽음이란 단어가 가사에 등장하는지는 몰랐는데, 왜 이전에는 듣지 못했을까. 갑자기 영에 대한 그리움이 강하게 밀려왔다. 영은 또 다른 원을 찾아갔겠구나. 영의 삶은 끝난 것이 아니었다. 다른 곳으로 떠났을 뿐. 어딘가에 계속 영은 존재할 것이라는 걸, 나는 느낄 수 있었다. 나의 손바닥을 펼쳐 조그맣게 원을 그리던 영의 따스함을 기억한다. 여전히 영은 내게 푸르른 초여름의 향기로 기억되고 있었다. 삶이 원이라면 사랑은 어떤 모양일까. 나에게 사랑은 영의 얼굴을 하고 있을 것이라고 잠재적으로 결론 내렸다.



 영도 언젠가 자신이 떠날 걸 알았기에 이 노래를 나에게 들려준 것이었을까? 영이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나눈 대화에서 죽음 뒤에 삶이 올 수는 없어도, 사랑은 올 수 있다던 영의 말이 떠올랐다. 세상에는 죽음보다 강한 사랑이 존재한다던 말과 함께. 영의 마지막 말을 꼭꼭 씹어 삼켰다. 영의 마음이 내 안 곳곳에 흘러 들어갈 수 있도록 조각조각 깨뜨리고 단어, 음절, 음운까지 잘게 부수어서 남김없이 먹어 치워버렸다. 눈물은 흘리지 않을 거야, 라고 나에게 나지막이 속삭이곤 그마저도 부수어 먹어버렸다.



 지난여름 영과 찍었던 필름 사진을 액자에서 꺼내 손에 쥐고 바라보았다. 영이 떠난 후로 한 번도 보지 않고 서랍 속에 넣어두었던 것이었다. 먼지를 털어내니 흐릿한 얼굴의 두 사람이 사진 속에서 다정하게 서 있었다. 사진에 찍힌 우리의 표정을 볼 순 없었지만, 나는 느낄 수 있었다. 영이 울고 있었다는 걸. 내 어깨에 올렸던 영의 손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음을 나는 이미 알고 있었지만, 그때 난 영의 눈물을 모른 척했다. 때로는 들키고 싶지 않은 슬픔도 있기 마련이니까.



 사진을 뒤집어보니 뒷면에는 짧은 글이 있었다. 우리가 함께 갔던 바닷가에서 내가 잠시 바다를 보며 한눈을 팔고 있는 동안 적은 듯했다. 내게 쓴 것으로 보이는 편지는 영의 차분한 글씨체로 한 자 한 자 눌러 적혀있었다.



 랑에게



 우린 절대 잊히지 않을 거야. 저기 저 바람에 쓸려 파도가 끝나는 곳까지 흐르고 흘러서 우리가 보이지 않게 되더라도, 우리는 죽음 뒤에 놓인 사랑으로 기억될 거야. 마침내 바다의 진자운동이 멈추게 되고, 기울어진 수평선 아래로 세계가 둥글어지면 다시 처음이 되어 만나자, 우리.



 영도 이미 오래전부터 작별을 준비하고 있었구나. 어쩌면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부터 영은 이렇게 되리란 걸 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영이 밉지는 않았다. 그 애 덕분에 무색무취이던 내 삶에 색과 향이 생겼으니까. 사랑이 뭔지 조금은 느끼게 해주었으니까. 아직도 사랑을 다 알진 못하지만, 나는 계속해서 영을 사랑하고 싶었다. 어딘가에 있을 영을 생각하며, 다시 영을 만날 날을 기다리며, 지구에서의 삶을 마저 살아가고 싶었다.



 그리고 영을 다시 만난다면 묻고 싶었다. 광활한 우주 어딘가 영이 있는 그곳에도 사랑이 있는지, 지구와 마찬가지로 여름이 있고, 그 계절에는 여느 날과 다름없이 파란 높새바람이 부는지도. 부디 그때는 나도 다른 원이 되어 영의 얼굴을 알아볼 수 있기를 바란다.



 나는 조용히 스피커의 볼륨을 올렸다. 빈방 가득히 영의 향기가 채워졌다. 나도 펜을 꺼내 영의 모습이 담긴 사진 뒤에 전하지 못할 편지를 써 내려갔다.



 영에게



 너의 따스함으로 나를 밝혀주어 고마워. 우리가 함께 보낸 시간들은 영원히 잊지 못할 거야. 네가 어디 있든 내 남은 사랑을 모두 보낼게. 네가 나를 찾든, 내가 너를 찾든, 우린 꼭 어딘가에서 다시 만나게 될 거야. 언젠가 우리가 다시 만나 비로소 원이 될 때, 서로를 지켜줬던 사랑의 모양을 그릴 수 있기를.



*Circle - TRP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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