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건 정말로 행운이 맞습니까?
- ‘행운'에 대한 고찰 -
우리는 행운을 언제 '행운'이라고 인식하는가? 너무 뜬금없는 질문이겠지만. 우리가 '행운'을 언제 '행운'이라고 인식하는지. 그리고 왜 우리에게 찾아온 그것을 '행운'이라고 인식하는지, 어떻게 그것은 '행운'이 되는지에 대해서 한번 생각해보자. 물론 많은 경우, 우리는 우리에게 찾아온 그것을 곧바로 '행운'이라고 인식한다. 예를 들어보자. 사람에 따라 차이가 있겠지만 만약 우리가 길을 걷다가 만원을 줍는다면. 우리는 곧바로 그 '길에서 만원을 주웠다'는 현상을 우리에게 찾아온 '행운'으로 인식할 것이다. 이제 다시 한번 생각해보자. '길에서 만원을 주웠다'는 현상은 왜, 그리고 어떻게 우리에게 '행운'으로 인식되는가? 그리고 왜 '길에서 만원을 주웠다'는 현상은 그렇게나 빠른 시간 내에 '행운'으로 인식되는가? '길에서 만원을 주웠다'는 현상이 '행운'이라고 답하는 것은 너무나도 쉽다. 그러나 그것이 왜 '행운'인지, 어떻게 '행운'이 되는지에 대해 답하는 것은 어렵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미 그것이 '행운'이라고 간주하고 있기 때문이다. '길에서 만원을 주웠다'는 현상이 이상할 정도로 빨리 '행운'으로 인식되는 이유 또한 그렇다. 우리에게는 이미 '행운'으로 간주되는 현상의 목록이 있으며, '길에서 만원을 주웠다'는 현상 또한 그 목록에 들어가 있다. 대부분의 행운은 그 목록에 포함되어 있는 현상을 벗어나지 않는다. 그렇기에 우리는 쉽고 빠르게 특정한 현상을 '행운'이라고 인식할 수 있다.
그러나 슬프게도 우리의 인식, 인간의 인식은 너무나 불완전하다. 우리에게 주어진 '행운'의 목록이 항상 들어맞는 것은 아니며. 때로는 '행운'의 목록에는 없는 '행운'이 우리에게 찾아오기도 한다. '불행'이라고 인식했던 것이 사실은 '행운'일 때도 있으며, '행운'이라고 인식했던 것이 '불행'일 때도 있다.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한 '행운'에 대한 두 서사, <파랑새> 와 <운수 좋은 날> 을 떠올려보자. <파랑새> 이야기에서 주인공들은 이미 자신들에게 찾아온 행운이 행운이라는 것을 눈치채지 못하며. <운수 좋은 날> 의 김첨지는 '운수 좋은 날'속에 잠복하고 있던 불행, 아내의 죽음을 막지 못하는 불행을 알지 못했다. 우리는 우리가 마주한 것이 행운인지, 불행인지 그저 짐작만 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런데 과연 행운에 명확한 실체가 있을까? '길에서 만원을 주웠다'는 현상을 다시 예로 들어보자면. 그 현상은 우리에게 두말할 것도 없는 행운이다. 그러나 '길에서 만원을 주웠다'는 현상 그 자체에 '행운'이라는 것이 내재되어 있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길에서 만원을 주웠다'는 현상이 '행운'이라고 누군가가 판단했으며, 그 판단을 우리가 받아들였기 때문에 우리는 '길에서 만원을 주웠다'는 현상을 '행운'으로 인식하는 것이다. 만약 우리에게 그 판단이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면, '길에서 만원을 주웠다'는 '행운'으로 인식되지 않을 수도 있다. 만원이 더 이상 어떤 가치도 없는 것으로 여겨지는 상황에서 우리가 만원을 주웠다고 생각해보자. 그런 상황에서도 우리는 '길에서 만원을 주웠다'는 현상이 행운이라는 판단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 더 나아가 '행운'이나 '불행'이라는 개념이 더 이상 작동하지 않게 된다면. 즉 '행운'이나 '불행'의 너머에 있는 개념이 등장하고, 그 개념이 행운이나 불행을 기존의 지위에서 밀어낸다면. 현상들은 더 이상 '행운'이나 '불행'으로 인식되지 않을 것이다. 즉 특정한 현상은 그저 그 자체로 존재할 뿐, 행운이나 불행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그저 우리가 그것을 '행운'이나 '불행'으로 인식하고, 그렇게 판단할 뿐이다. 같은 현상을 보더라도 그 현상을 어떻게 판단하느냐에 따라서 현상은 완전히 다르게 인식 될 수 있다. 누군가에겐 행운일 현상이 누군가에겐 불행일 수도 있고, 또 다른 누군가에겐 아무것도 아닐 수도 있다. 즉 '행운'은 일종의 가치 판단이다. 우리는 우리에게 '행운'으로 인식된 것을 '행운'으로 판단한다. 동시에 우리는 우리가 '행운'으로 판단한 것을 '행운'으로 인식한다. 좀 더 알기 쉽게 말하자면. '우리'는 무언가를 '행운'으로 판단하고, 그렇기 때문에 '행운'으로 판단한 무언가를 '행운'으로 인식한다. 그리고 대부분의 경우 우리는 기존에 '행운'으로 판단했던 것을 마주치기 때문에 기존의 판단을 바탕으로 '행운'을 인식하며, 그렇게 '행운'으로 인식된 것이 '행운'이라고 판단한다. '행운'의 차이를 만드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인식의 차이다.
사실 이러한 '인식의 차이'는 너무나도 당연한 것이다. '나'와 '너'의 인식이 완전히 같아지기 위해선 '나'와 '너'의 차이가 없어져야 할텐데. '나'가 '너'를 '나'가 아닌 '너'로 인식한다는 것은 이미 '나'와 '너'사이의 차이, '너'를 '나'가 아닌 '너'로 만드는 차이가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너'를 '너'로 만드는 차이, 다른 누군가도 아닌 오직 '너'로 만드는 차이 때문에 인식의 차이는 발생한다. '나'는 '나'와 '너'가 다르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너'를 '너'라고 인식하며. 그렇게 판단하게 만든 '나'와 '너'의 차이가 '인식의 차이'를 만들어낸다. 물론 '나'는 '너'와 특정한 정체성을 공유하고 있을 수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나'의 인식과 '너'의 인식이 어느정도 일치할 수도 있다. 그러나 '너'를 '너'로 만드는 그 차이 때문에. '너'가 '나'와 공유하고 있지 않은 그 무엇 때문에 '나'와 '너'의 인식은 완전히 일치할 수 없다. '너'와 '나'사이의 차이가 매우 사소한 것이라 할지라도, 그 사소한 것 때문에 '너'와 '나'의 차이가 발생하는 이상 우리의 인식은 달라진다. 따라서 '나'가 '나'이고 '너'가 '너'인 이상 '나의 인식'과 '너의 인식'은 달라질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나'와 '너'의 인식이 다른 것은 결코 잘못된 일이 아니다. 문제는 오히려 '나'의 인식과 '너'의 인식을 일치시키려 했을 때 발생한다. '나'는 아무리 노력해도 '너'의 인식과 '나'의 인식을 일치시킬 수 없다. 이는 '나'의 잘못도 '너'의 잘못도 아니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것이지만, '너'와 '나'의 차이가 커질수록 '너'와 '나'사이의 인식의 차이도 커진다. 서로 다른 환경에서, 너무나도 다른 삶을 살았던 사람들이 만난다면 그들은 같은 것을 보더라도 다르게 인식할 것이다. 만약 분쟁 지역에서 용병으로 살던 사람과 평범한 학생으로 살던 사람이 함께 생활하게 된다면, 더 나아가 한쪽에게 다른 한쪽의 생활 방식을 요구한다면 어떻게 될까. 말할 필요도 없이 매우 곤란한 상황이 펼쳐질 것이다. 그들은 상대방의 생활 방식을 이해하기 힘들 것이며, 따라하기도 힘들 것이다. 그들의 인식 또한 마찬가지다. 그들은 상대방의 인식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한쪽이 다른 한쪽의 인식을 자신과 동일하게 만드려고 해도. 다른 한쪽의 인식을 완전히 백지 상태로 만들지 않는 이상 서로의 인식을 완벽하게 일치시킬 수는 없다. 일본의 소설 시리즈 <풀메탈 패닉!> 은 이와 관련된 매우 뛰어난 사례라고 할 수 있는데. 소설의 주인공 사가라 소스케는 분쟁 지역에서 활동하던 용병이지만, 임무를 받고 일본의 고등학생 치도리 카나메를 지키기 위해 자신도 고등학생이 된다. 소설에서는 자주 소스케의 카나메와는 확연히 다른 생활 방식, 확연히 다른 인식으로 인한 해프닝이 등장하는데. 주된 원인은 소스케가 평화로운 일상 속에서도 분쟁 지역에서의 생활 방식과 인식을 고수하기 때문에 발생한다. 카나메의 역할은 그런 소스케에게 '평범한'생활 방식과 인식, 즉 평화로운 일상 속에서의 생활 방식과 인식을 조금은 폭력적인 방식으로 가르치는 것이다. 물론 평화로운 일상 속에서의 생활 방식과 인식은 카나메의 생활 방식과 인식이기도 하다. 다시 행운에 대한 논의로 돌아가면. 아마 소스케와 카나메의 '행운'에 대한 인식도 서로 다르지 않을까. 작중에서 이와 관련된 에피소드가 등장하지는 않지만. 필자는 분명히 소스케가 인식하는 행운과 카나메가 인식하는 행운이 다를 것이라 생각한다. 카나메가 행운이라고 생각한 것이 소스케에게는 행운이 아닐 것이며. 소스케가 행운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카나메에게는 행운이 아닐 것이다. 때로는 둘의 의견이 일치할 때도 있겠지만, 아마 대부분의 경우 일치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분쟁 지역에서의 행운과, 평화로운 학교 생활에서의 행운 사이에 과연 얼마나 많은 차이점이 있을까. 오히려 공통점을 찾는 편이 빠를 것이다.
정리하자면, 우리는 행운을 불완전하게 인식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우리의 인식 자체가 매우 불완전하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행운에는 고정된 실체가 없다. 인식에 아주 약간의 차이만 생겨도 '행운'은 '불행'이 될 수 있으며, '불행'이 '행운'이 될 수도 있고, '행운'이 '행운'도 '불행'도 아닌 평범한 것이 될 수도 있다. 이 모든 것은 결국 우리의 인식이 불완전하기때문에 발생한다. 우리가 보는 것에 명확한 실체가 있건 없건 상관없이, 우리는 그것을 완전히 인식할 수 없다. 물론 그것이 명확한 실체를 가지고 있는지에 대한 여부조차도 불완전하게 인식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고정된 실체가 없는 것을 때때로 고정된 실체가 있는 것처럼 인식한다. 주로 가치 판단에서 이런 오류가 자주 발생한다. 어떤 대상은 그 대상이 고유한 가치를 가지고 있기에 특정한 가치가 매겨지는 것이 아니다. 대상 그 자체에는 어떠한 가치가 없다. 이 '가치 없음'은 부정적인 의미의 '가치 없음'이 아닌, 말 그대로 '가치'라는 개념이 존재하지 않음을 뜻한다. 그것은 오직 누군가가 그것이 특정한 가치를 가지고 있다고 판단했을 때에만 특정한 가치를 지닌다. 그렇지만 누군가에겐 특정한 가치가 있다고 판단된 것이 다른 누군가에겐 아무런 가치가 없다고 판단될 수도 있다. 이 때 그 어떤 판단도 '틀린'판단은 아니다. 누군가에겐 그것이 정말로 가치가 있는 것이고, 다른 누군가에겐 그것이 정말로 아무 가치가 없기 때문이다. 이 차이는 '누군가'와 '다른 누군가'가 다르기 때문에, '누군가'와 '다른 누군가'를 구분하는 차이 때문에 발생할 뿐이다. '누군가'가 틀렸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은 아니며 '다른 누군가'가 틀렸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도 아니다. 그저 둘 사이에 차이가, 필연적으로 생길 수밖에 없는 차이가 존재할 뿐이다. 물론 이 차이를 좁힐 수는 있다. 누군가의 판단 또한 바뀔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차이는 어디까지나 좁혀질 뿐,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는다. 비평의 역할은 이 '누군가'가 되는 것이다. '나'에게는 '이것'이 행운으로 인식된다고, '나'는 '이것'을 행운으로 판단했다고 말하는 것이다. 물론 '이것'을 행운으로 인식하지 않는, '이것'을 행운으로 판단하지 않은 '다른 누군가'도 존재할 것이다. '나'는 그 '다른 누군가'와 충돌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이 바로 비평이다. 오히려 우리는 충돌이 발생하지 않는 것을 더 걱정해야 할지도 모른다. 충돌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결국 모두가 똑같아졌다는 것을, 우리 사이에 그 어떤 미세한 차이도 존재하지 않게 되어버렸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글을 마치면서, 필자는 하나의 질문을 던지고자 한다. '너'의 행운과 '나'의 행운이 다른 것은 행운일까 아닐까? 물론 필자의 답은, 그것이야말로 우리에게 주어진 최대의 행운 중 하나일 것이라는 것이다. 다르게 생각한 사람도 있겠지만, 그것조차도 행운 아닐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