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2024년 노벨문학상 수상자 선정 당시 스웨덴 한림원 측은 한강 작가를 두고 “역사적 트라우마를 직시하고 인간 삶의 연약함을 드러내는 강렬한 시적 산문을 선보였다”고 평가했다. 한강 작가는 『소년이 온다』에서 실존 인물인 문재학 열사를 모티브로 민주화 운동과 그 이후의 상흔을 문학 언어로 제시해 큰 사회적 울림을 안겼다.
많은 예술 작품들은 사회적으로 큰 변혁을 일으킨 ▲참사 ▲재해 ▲역사적 사건을 소재로 삼아왔다. 역사적 트라우마를 예술로 승화한 긍정적 사례가 사회에 위로를 전하는 반면, 실화의 부적절한 재현은 때로 더 깊은 갈등과 상처를 일으킨다. 실제를 빌린 예술 콘텐츠는 어째서 명과 암을 동시에 지니는 것이며, 창작자는 실화를 어떻게 다뤄야 할까.
▲ 영화 <암수살인> 스틸컷. 유가족 측은 해당 영화가 사전 동의를 얻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실제 범행 수법과 발생 지역 등을 그대로 묘사해 인격권을 침해했다고 주장했다. (출처=네이버 영화 제공)
유가족 두 번 울린 영화 <암수살인>
지난 2018년 개봉한 김태균 감독의 <암수살인>은 2007년 발생했던 ‘부산 암수사건’을 모티브로 제작된 범죄 스릴러 영화다. 배우 김윤석이 범인의 자백으로 사건을 파헤치는 형사 김형민 역을, 주지훈이 연쇄살인마 강태오 역을 맡아 열연을 펼쳤다. 그러나 이 작품은 개봉을 앞두고 상영 금지 가처분 신청이라는 위기를 맞았다. 실제 사건을 바탕으로 했음에도 제작 과정에서 유가족의 동의를 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유가족 측은 영화가 “부산 암수사건 피해자의 나이, 살인범의 범행수법은 물론 피해자가 범인 칼에 찔린 지역까지 그대로 묘사했다”고 문제를 제기했다. 당시 피해 유가족의 법정 대리인은 제작사 측이 유가족과 피해자의 잊혀질 권리를 보장하지 않아 발생할 인권 침해 역시 상영금지 가처분 신청의 이유라고 덧붙였다.
법정 공방은 애초 개봉예정일이던 10월 3일(수) 직전까지 이어졌으나 결국 제작사로부터 진심 어린 사과를 받은 유족이 가처분 소송을 취하하면서 종결됐다. 그러나 <암수살인>과 같이 유가족의 동의 없는 예술적 재현은 여전히 고질적인 문제로 남아있다.
<설강화>와 <그놈 목소리>, 재해석인가 왜곡인가
동의 없는 재현만큼 문제되는 것이 사실 왜곡이다. 2021년 12월 방영한 JTBC 주말 드라마 <설강화>는 시놉시스 공개 시점부터 방영 당시까지 지속적으로 논란이 제기됐다. 민주화 운동이 진행된 1987년을 배경으로 한 <설강화>는 시위에 참여하는 대학생과 남파공작원 사이의 로맨스를 담았다. 대중들은 역사적으로 상징성이 큰 시기를 배경으로 한 <설강화>가 민주화 운동을 왜곡하고 국가안전기획부(이하 안기부)를 미화한다고 비판했다. 안기부 미화의 의도가 없다는 제작진 측의 지속적인 해명에도 불구하고 <설강화>는 2~3%대의 시청률을 유지하다 종영했다.
2007년 개봉한 영화 <그놈 목소리>는 1991년 발생했던 ‘이형호 유괴 살인 사건’을 다뤘다. 해당 영화는 실제 사건을 극화하는 방식에 논란이 있었다. 영화 내내 무능함의 극치로 묘사되는 경찰이 범인에게 농락당하거나 돌발행동을 하는 등 실제 사건과 무관하고 불필요한 장면들이 다수 포함됐다. 이 과정에서 반기독교 정서와 같은 감독 개인의 신념이 서사를 방해할 만큼 노골적으로 드러났다. 실제 사건이 예술의 소재가 될 때 매체의 특성에 맞게 재해석되는 과정은 필수적이다. 그러나 앞선 사례들은 예술적 재해석이 가진 왜곡의 위험성을 보여준다.
창작 윤리로 돌아본 실화 기반 콘텐츠
지난 2019년 영화진흥위원회(이하 영진위)는 ‘실화 기반 영화 제작을 위한 가이드라인’을 발표했다. 영진위는 실화 기반 영화로 인해 침해될 수 있는 기본권으로 ▲인격권 ▲프라이버시권 ▲잊혀질 권리 등을 제시하며 “사전 동의와 허락 조건을 협의하되 이를 구하지 못했을 때에는 최대한 특정 인물이 연상되거나 그 인물의 명예를 훼손하지 않도록 각색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한 “영화 제작 사전에 시나리오에 대한 법률 자문을 받아 누락되는 사항이 없도록 점검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실화를 소재로 삼을 때 법적 측면만큼 중요한 것이 개인의 창작 윤리다. 본지는 우리대학 박영준 문예창작학과 교수를 만나 창작자가 갖춰야 할 윤리적 태도를 물었다.
Q. 실화를 소재로 삼을 때 창작자가 가장 주의해야 하는 점은 무엇인가요?
A. 과거에는 가해자들의 가해 행위에 치중했지만, 지금은 (그에 대한 반성으로) 피해자를 서사의 중심에 둡니다. 이를 정의로움에 다가가는 방향이라고 한다면 창작자 역시 ‘피해자 중심 서사’를 어떻게 구축할 것인가를 고민해야 합니다. 가장 피해야 하는 것은 서사적인 흥미를 위해 피해자의 슬픔을 악의적으로 변형·왜곡하는 것입니다.
Q. 특정 사건을 소재로 삼을 수 있는가의 여부를 판단할 방법은 무엇인가요?
A. 실제 사건은 예술적 변형이 허용되는 폭이 (비교적) 좁습니다. 최우선적으로는 해당 소재를 왜 선택했는가를 스스로 설명할 수 있어야 하고, 나아가 그 선택의 기준이 사회적으로 납득돼야 합니다. 덧붙여 실제 사건 사고를 메인으로 할 때에는 사회적인 시각만큼 개인의 일상과 인권이 침해되지 않는 영역을 들여다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인터뷰를 마치며 박영준 교수는 “창작자가 개인과 사회의 관계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해야 한다”며 “타인의 삶을 예술 소재로 삼을 때 실화의 적절한 예술적 재현을 위해 소재주의에 치우치지 않으면서 사회적인 공감대와 가치관을 정립할 수 있도록 훈련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덧붙여 “이러한 덕목이 갖춰졌을 때 비로소 실화를 소재로 한 예술이 긍정적인 신호를 줄 수 있게 된다”며 창작 윤리에 대한 방향성을 제시했다.
이혜원 수습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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