렘브란트는 17세기에 활동했던 네덜란드의 화가다. 바로크 시대를 대표하는 화가임과 동시에 유럽 미술사를 대표하는 위대한 화가 중 한 사람으로 인정받는다. 렘브란트는 작품을 만들 때 의도적으로 빛과 어둠의 강한 대비를 만들어 능숙하게 사용해 ‘빛의 화가’라고도 불린다. 특히, 그는 빛을 조절해 정교한 구도를 만들고, 인물을 탁월하게 묘사해낸다. 또 그 안에 오묘한 인간의 감정을 담아내고자 했던 점이 높이 평가되고 있다.
그는 자화상과 초상화를 수백 점 넘게 그린 화가로도 유명하다. 자기 자신의 모습을 담은 자화상은 지금까지도 그 작품성을 널리 인정받는다. 그가 그린 자화상을 쭉 나열해 본다면 그의 변화해가는 작품세계를 충분히 가늠할 수 있기도 하다. 또 그의 인생 서사를 이해하며 자화상들을 함께 해석해보면 더욱 깊이 있는 감상이 가능하다.
렘브란트의 초상화는 당시 무역으로 많은 돈을 번 네덜란드의 상인들을 대상으로 한 것이 대부분이었다. 그의 초상화 기법 중에, 현재까지 남아있는 조명기법도 존재한다. ‘렘브란트 조명기법’으로 그림자가 뚜렷한 극적인 조명을 지칭하는 말이다. 이는 렘브란트가 그의 초상화에서 명암의 강한 대비를 통해 강렬한 이미지를 추구했던 데서 유래한 용어이다. 피사체의 사각 30° 위에 키 라이트(key light)를 비추면 콘트라스트(한 장면 내의 가장 밝은 부분과 가장 어두운 부분과의 상대적 차이)가 강해지는데 이를 렘브란트 조명이라고 한다. 흔하게 인물의 옆쪽에서 조명을 비춰 한쪽 면에선 화사한 빛을 그대로 받고, 반대쪽 눈 밑에 역삼각형이 생기는 기법을 말한다.
이렇듯, 당시 사람들에게 명암을 이용한 자신만의 그림 스타일을 인정받고, 값이 비싼 작품들을 팔거나 그림 의뢰를 받아 렘브란트는 큰 부와 명성을 쌓았다. 예컨대, 암스테르담 의사협회에게 의뢰받은 ‘니콜라스 튈프 박사의 해부학 강의’에서 그가 보여준 인물들의 극적인 배치와 생생한 표정과 정교한 근육 묘사는 호평을 받았다. 이 시기가 화가 렘브란트의 삶에서 가장 찬란한 순간들이었다. 당시 그가 그린 자화상을 보면 우아한 옷을 입고 멋스러운 자세를 한, 시선은 아래를 내려다보는 위풍당당한 모습들이 많다.
하지만 열흘 붉은 꽃 없듯, 그의 명성과 인기는 한순간에 무너져 내렸다. 바로 1642년에 그가 그린 ‘야경’이라는 그림 때문이었다. 이 그림은 암스테르담 자경단 협회의 의뢰를 받아 그린 것으로 렘브란트는 당시의 일반적인 단체초상화를 그리기보단 자신의 장기인 명암기법을 이용해 작품을 그렸다. 하지만 그의 기법 특성상 누군가는 조명을 받아 화려하게 표현됐지만, 같은 돈을 지불한 다른 나머지는 어두운 그늘 밑에서 배경처럼 묘사돼 의뢰인들은 크게 실망했다. 동시에 그의 평판도 추락했다. 그 후로 그에게 들어오는 작품 의뢰 수도 줄어들고, 그만큼 그의 명성도 점차 사그라들었다. 이전부터 계속돼 온 렘브란트의 사치스러운 소비로 그는 결국 파산 신고까지 하게 된다.
이 시점에 그의 작품세계도 많은 변화가 있었다. 작품은 날이 갈수록 심오해졌다. 인간 개인의 내면과 그 깊이를 다룬 작품들이 많아졌다. 또 더이상 위풍당당한 고관대작 같았던 그의 자화상은 보이지 않았다. 더 나은 작품을 위해 계속해서 담금질 당하는 중년 화가만이 보일 뿐이었다.
렘브란트에게 자화상은 아마 자신을 들여다보는 하나의 창구였을 것이다. 우리도 그의 작품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그가 그려내고자 했던 삶의 흔적이나 자취를 느낄 수 있다. 위의 그림은 1659년 53세의 나이에 그가 그린 자화상이다. 그림 속에선 여러 역경을 겪고 우여곡절이 담긴 자신의 삶을 초연히 받아들이는, 또 있는 그대로 가만히 직시하고 있는 한 사람이 보인다.
우리는 가끔 여러 가지 일로 이리저리 치이고 내 삶에 방향을 잡지 못하는 순간이 있다. 렘브란트의 자화상은 그럴 때마다, 투명하게 우리 자신을 있는 그대로 비춰주는 거울이 돼 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