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 열린 에너지원이 평화적 목적으로만 이용되면 좋겠다. 나는 원자폭탄 제작이 실패하기를 희망하지만, 성공할 것 같다는 두려움이 있었다. 내 두려움은 들어맞았다.”
이 말을 남긴 사람은 오스트리아-스웨덴의 물리학자 ‘리제 마이트너’이다. 과학자 리제 마이트너는 지금과 달리 여성 교육에 보수적이었던 1980년경 유럽 사회에서 태어나 늦게 전문적인 공부를 시작했다. 이론 물리학을 공부하기 위해 찾아간 독일 연구소에서는 여성을 비하하는 편견과 맞서며 학문에 매진했다. 연구소에서 여성의 출입이 허용되지 않아 지하실에서 연구해야 했고, 화장실 이용을 위해 매번 지하실을 나와 길을 건너야 했다. 이런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물리학 공부에 몰두해 오스트리아의 두 번째 여성 박사학위자가 됐고 프리드리히-빌헬름 대학교 교수 ‘막스 플랑크’의 첫 번째 여성 수강자가 됐다. 마이트너는 플랑크의 강의를 1년 수강한 뒤 플랑크의 조교 생활을 시작했다. 조교 생활 첫해에 동료 ‘오토 한’과 함께 원자번호는 같지만, 질량은 다른 동위원소 여러 개를 발견했다. 1917년, 마이트너와 한은 프로탁티늄의 안정적 이성질체를 최초로 발견했다. 이 공로로 프로이센 과학 아카데미에서 라이프니츠상을 받았다.
1930년대 초에 중성자가 발견된 뒤, 과학계는 우라늄(원자번호 92)보다 무거운 원소를 실험실에서 인공적으로 만들 수 있을지 모른다는 추측을 했다. 그렇게 영국의 어니스트 러더퍼드, 프랑스의 이렌 졸리오퀴리, 이탈리아의 엔리코 페르미, 그리고 독일의 마이트너-한 사이에 경쟁이 벌어졌다. 경쟁에 참여한 이들은 모두 이것이 노벨상감이 될 수 있는 연구라고만 생각했다. 핵무기에 대한 생각은 아무도 하지 못하던 시절이었다.
1939년에는 오토 한과 마이트너는 우라늄이 중성자를 흡수하면 핵분열을 일으킨다는 것을 처음으로 발견했고, 원자핵을 강제로 붕괴시킬 수 있는 ‘방사성 반조(Radioactive Recoil)’라는 기법을 발전시켰다. 또한 핵분열 때 발생하는 대량의 에너지를 아인슈타인의 유명한 질량-에너지 등가 공식 E=mc²을 이용해 최초로 설명했다. 그녀는 핵분열을 해석함으로써 원자폭탄과 핵무기 제조의 가능성을 열었다. 핵분열이 엄청난 에너지를 방출하는 동시에 중성자가 또 다른 핵분열을 유발하는 연쇄반응이 실존한다면 상상을 초월하는 총량의 에너지가 방출될 수 있다. 이것은 군사적으로 응용될 가능성이 다분했다. 이후 그녀는 미국 과학계로부터 능력을 인정받아 원자폭탄 개발 계획인 ‘맨해튼 프로젝트’에 참여해 달라고 적극 권유받았다. 그러나 그녀는 권유를 단호하게 거절했다. 마이트너는 “과학이 결코 살인 무기를 개발하는 수단으로 쓰여서는 안 된다”고 말하며 맨해튼 프로젝트 참여 제안을 거부했다.
이후 한과 마이트너 두 사람은 핵분열을 발견한 공로를 인정받아 각각 화학상과 물리학상 후보자로 여러 번 지명됐지만 리제 마이트너는 노벨상 공동수상자의 자리에 오르지 못했다. 1944년 공동연구자 동료 ‘오토 한’만이 단독으로 우라늄핵분열을 증명한 공로를 인정받아 노벨상을 수상했다. 이후 노벨 위원회의 회의록이 공개되고 난 후 , 리제 마이트너가 노벨상을 받지 못한 것에 관한 이의제기가 재부상했다. 리제 마이트너가 노벨상을 공동 수상하지 못한 것은 노벨 위원회가 그 구조상 학제간 연구를 이해하기 어려웠기 때문으로 보인다. 화학상 담당 위원회의 위원들은 그녀가 여성이자 유대인 출신이라는 이유로 그녀의 기여분을 정당하게 평가할 능력 또는 의지가 없었을 것이다. 마이트너의 화학상 배제는 학문 분야상의 편향, 정치적 둔감함, 무지함, 조급함이 복합된 결과였다.
실제로 모든 경이로운 과학적 발견 뒤에 기다리고 있는 인간의 탐욕을 바탕으로 한 악행들과 핵 이론이 핵폭탄 제조에 쓰였다. 화학 이론과 연구들이 독가스를 만드는 데 쓰였던 불운한 시대에 리제 마이트너는 단 한 번도 자신의 연구가 전쟁의 도구로 쓰이는 걸 허락하지 않았다. 자신의 욕심보다는 올바른 과학을 추구했던 과학자 리제 마이트너를 모두 기억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