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도 챗GPT가 어떤 일을 할 수 있는지 수많은 뉴스가 갱신되고 있다. 챗GPT를 다룬 글의 수명이 얼마나 될지 또한 쉽게 장담할 수 없다. 챗GPT의 미래를 다루는 것이 불가능하므로 대신 과거를 살펴본다.
장면 하나, 2006년 한 페인트전문업체가 주최한 정보검색대회에서 엠파스를 사용하는 것이 금지됐다. 이는 대회 문제인 ‘실리콘밸리를 명명한 마이크로일렉트로닉스의 편집자의 이름은 무엇인가’에 대한 답을, 다른 검색엔진과 달리 문장을 그대로 입력하는 것만으로 쉽게 찾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장면 둘, 거대언어모델 GPT-3가 인터넷에 공개된 것은 2021년 11월이었지만, 사람들이 본격적으로 AI가 생성하는 자연어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챗GPT가 공개된 2022년 11월 즈음이다. 나는 이 두 장면에서 우리들의 의인주의적 편향을 본다.
의인주의(anthropomorphism)란 본디 비인간적인 것이 인간과 같은 특징을 가진 것처럼 묘사되거나 표현되는 것을 말한다. 몸부림치는 두족류를 보면서 고통스러워하는 것에서부터, 먹통이 돼버린 모니터를 머리를 치듯 때리는 일에 이르기까지 인간의 다양한 행동양식을 설명한다. 우리는 다양한 비인격적 존재들과 인격적으로 교류하는 데 익숙하며, 또 그러고자 한다.
글쓰기와 챗GPT의 관계를 논하는데 의인주의적 편향이 무슨 관련이란 말인가? 이 사실을 이해해야만 인공지능 시대 글쓰기에서 우리가 집중해야 할 부분이 어디인지 알 수 있다. 짐작컨대 챗GPT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이 가파르게 상승한 이유는, 그것이 채팅형의 인터페이스를 가졌기 때문일 것이다. 엠파스가 문장으로 정보에 접근할 수 있었던 이유로 탁월한 검색성능을 인정받았던 일과 마찬가지이다.
점심으로 불닭볶음면보다 덜 매운 라면을 먹기 위해 ‘스코빌지수’라는 키워드를 떠올리고, 지수를 찾아내어 결과를 비교하는 수고로움을 감수할 사람은 많지 않다. 챗GPT는 정확히 그 일을 해내고, 불닭볶음면보다 더 복잡한 것들도 다룰 줄 안다.
문제는 이 과정에서 결과가 부각된 나머지 그 과정을 우리가 등한시하게 된다는 데에 있다. 챗GPT를 통해 좋은 글을 쓰기 위해서는 그 글의 진위를 판별하고, 질문을 이어가며, 결과물을 교정할 수 있는 행위자가 필요하다. 마치 가상의 인격이 들려주는 것 같은 놀라운 결과물에 매혹되지 않고, 그것이 어떻게 가능한 것인지 구체적인 활용의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
학생들에게 글을 가르칠 때 ‘짜깁기’라는 말을 사용하는 데에 거부감이 없는 편이다. 본디 이 말에 부착된 부정적인 면을 걷어대고 보면, ‘짜깁기’라는 표현은 글쓰는 과정을 비교적 정확하게 묘사한다. 단적으로 나 자신만 하더라도 여러 단락을 산발적으로 작성한 뒤, 얼개에 따라 단락을 결합시키는 방법으로 글을 쓴다(이 칼럼도 그렇게 쓰였다). 그리고 이 단락들은 많고 적게 다른 사람들의 글에서 얻은 정보나 생각들 위에 쓰인다. 이 모든 일은 편집과 수정을 간편하게 하는 컴퓨터, 그리고 다른 사람들의 생각에 접근하게 해주는 인터넷이 없이는 불가능하다. 글은 이처럼 글쓰는 이와, 그가 접속 가능한 수많은 도구들의 교차지점에서 나온다.
나는 인공지능과 인간의 대결구도가 상당부분 가짜문제라고 생각하는 편이다. 불확실성이 주는 두려움, 생존과 관련된 불안을 걷어내고 보면 사태는 인공지능을 능숙하게 다루는 인간과, 잘 활용하지 못하는 인간의 분할구도로 달리 보인다. 이것은 한편으로 시대의 진보에 적응하는 자와 그렇지 못한 자라는 처연한 구도를 연상시키는 측면이 있다. 그러나 우리가 배움의 열망을 놓치지 않으려면, 제대로 질문 던지는 일을 결코 포기할 수 없다. 이 도구를,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