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시를 읽는 이유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의 ‘최초’에 관해 생각해본 적 있는가? 최초의 언어는 그 존재 자체를 가리키는 것이었을 것이다. 기자는 종종 한 단어를 가지고 오랜 시간 곱씹으며 공상에 잠길 때가 있다. 예를 들어 ‘나무’라는 단어에 집착하며 나무는 왜 나무이며, 나무를 처음 바라보는 이는 왜 나무를 나무로 명명했는지, 나무는 어떻게 나무가 된 건지 따위의 생각이 꼬리를 물고, 물고 물어가는 것이다. 결론은 없다. 정답도 없다. 그저 마구잡이로 튀어나온 생각의 실밥만이 조금 정리될 뿐이다. 한편 이수정 교수의 『시의 이해』라는 책에서는 최초의 언어에 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최초의 언어는 존재의 집으로서 존재 그 자체를 가리키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언어는 사람들이 사용할수록 존재의 본질은 망각되고 관념화돼 보편성을 추구하는 의미론적 기호가 돼버립니다. … 오래 사용된 동전처럼 마모된 일상 언어는 매우 빈약한 의미만을 지니게 됩니다. ”
일상에서의 사용으로 우리에게 익숙해진 언어는 그 자체로의, 즉 본질적 존재로서의 역할이 희미해졌다. 이것과 관련해 철학자 하이데거는 일상적 세계에서 사용하는 말을 ‘잡담’이라 표현한다. 하이데거는 일상적 언어 역시 본디 순수성을 지녔으나, 존재 자체를 드러내는 대신 소통의 수단으로 전락하며 그 본질과 개방적 성격을 잃었다고 말한다.
발견은 언제나 유의미하다. 미지의 것을 발견해 그것에 ‘언어’를 붙여주는 일은 더욱더 유의미하고 환상적이다. 명명과 인식은 언제나 기쁨과 환희를 불러일으킨다. 그런데 왜 우리는 본질과 새로움에 집착하기보단 일상적인 것에 초점을 맞춰 그것에 빠져드는 것일까? 언어를 통해 새로운 순간을 맞이하는 쾌락에 젖어야 함이 마땅한 것 아닌가?
기자는 그 이유가 언어의 용이성과 연관돼 있다고 생각한다. 소통에서 사용되는 언어는 편리해야 하고, 편리함은 피곤함을 유발하지 않아야 한다. 따라서 충격을 줄 수 있는 언어의 새로움보다는, 익숙한 언어에 초점을 맞추다 보니 언어가 ‘의미론적 기호’로 전락했다는 것이다. 참 안타까운 일이다. 물론 매번 신선한 것을 마주하는 일은 쉽게 피로를 유발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무언가를 발굴해냈을 때의 벅찬 감정을 상기시켜 보자면, 익숙함에 속아 넘어가는 것이 조금 아쉽게도 여겨진다.
하지만 마냥 아쉬워만 할 일은 아니다. 우리에게는 ‘시’가 있기 때문이다. 시는 우리가 익숙함에 속아 소중한 것을 잃지 않도록 해준다. 시는 단순히 관념적이고 기호론적인 것처럼 여겨지는 언어를 새롭게 요리해낸다.
모호성과 총체성, 그리고 무한한 가능성을 지닌 시는 우리가 무언가를 애써 발견해내지 않으려 해도 새로움을 가져다준다. 시는 최초의 언어와 가깝다. 감정의 언어라는 것이다.
시가 언어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언어는 다만 하나의 일상에 지나지 않았다. 시의 목소리를 통해 세상의 보잘것없는 존재들은 이름이 생기고, 새로운 언어의 일환으로 자리 잡는다. 시는 어떠한 존재를 단순히 지칭하는 것을 넘어 그것의 본질을 나타낼 수 있다. 오직 언어로만 이루어져 있는 시는 언어의 일상적 쓰임을 뛰어넘을 수 있기에 우리는 그것을 ‘역설의 언어’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그 자체의 역설적임을 우리는 반드시 깨닫고, 그것을 일상 속에 이용할 수 있어야 한다.
“마음속 깊이 우러나오는 무언가”와 같은 문장에서 ‘무언가’를 풀어서 표현하기란 굉장히 어려운 일이다. 좋은 시를 읽을 때면 항상 마음속에서 무언가가 우러나오는 듯한 감정을 느낀다. 이제 그 ‘무언가’의 정체를 설명할 수 있을 것 같아 기쁘다. 좋은 시는 익숙함에서 느끼는 지루함을 함몰시킨다. 함몰되는 과정에서 튀어나오는 파편과 부서진 조각조각이 우리를 깊게 찌르고, 우리는 충격을 받는다.
시는 익숙하고 무료해진 언어를 충격적으로 바꿔 놓는다. 시가 주는 무한한 가능성과 그것이 언어를 이용하는 방식에 깊은 감탄을 느낀다. 익숙한 언어에 속아 ‘시’의 언어를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