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력의 정당성’에 대한 고민이 많아지는 시기다. 세상 어디에도 정당한 폭력은 없다고 믿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훈육을 위한 적절한 체벌은 허용돼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도 있다. 혹자는 폭력을 폭력으로 제압하는 것이 ‘선(善)’이며, 폭력은 인간 사회에서 ‘필요악’이라고 말한다.
절대선은 없다. 세상의 이해관계는 너무나도 복잡하게 얽혀있다. 누군가를 위한 일이 다른 이에게는 해가 될 수 있고, 옳다고 생각한 일의 이면에는 생각지도 못한 부작용이 즐비해 있다.
인류는 역사상 크고 작은 폭력을 행사해 왔다. 대의명분을 가진 전쟁이나 역사 속 살인도 결국은 폭력의 일종이다. 21세기에도 법은 범죄자에게 징벌을 이유로 폭력을 행하고, 경찰관은 용의자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폭력을 휘두른다.
“정당한 폭력은 없다”는 말은 틀렸다. 인류는 폭력 없이 살 수 없다. 자기 방어를 위해, 사회적 변화를 이루기 위해, 더 큰 폭력을 막기 위해 폭력은 하나의 필수적인 수단이었다. 인류 역사상 폭력을 막을 방법은 폭력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폭력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주체는 누구인가? 비단 폭력 뿐 아니라, 우리 사회에 일어나는 모든 일에 ‘정당하다’는 기준을 만드는 것은 사회다. 그렇다면 사회가 인정하는 폭력은 늘 정당한 폭력일까?
사회는 가변적이다. 심지어는 가변적이라는 개념조차 상대적이어서 사회에 온전히 책임을 떠넘길 수는 없는 노릇이다. 영화 <말죽거리 잔혹사>처럼 수십년 전에는 교사가 학생을 때리는 일이 당연했고, 그때는 그게 ‘정당한 폭력’으로 비춰졌을지도 모른다.
좀 더 끔찍한 예시를 들자면, 나치 독일에서는 홀로코스트(유대인 집단 학살 사건)도 정당한 폭력이었다. 당시 사회는 ‘반유대주의’라는 핑계로 학살에 정당성을 부여했다. 결국 사회가 인정한다는 폭력이라고 해서 항상 정당한 폭력은 아니다.
정당성이라는 상대적인 개념에 기준을 만드는 것은 어렵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도 넘지 말아야 할 마지노선 정도는 논의해볼 수 있다.
폭력은 주로 강자가 약자에게 행한다. 어떤 경우에도 강자인 가해자가 약자에게 행하는 폭력을 스스로 정당화해서는 안 된다. 가해자가 폭력을 정당화하는 순간부터 비극은 시작된다. 처음에는 그저 “자녀가 말을 조금 안 들어서”, “바른 길로 지도하기 위해서”라는 핑계로 회초리를 집어든다. 하지만 그런 핑계로 집어든 회초리는 부모의 편의를 위한 도구로 전락한다. 가정폭력의 시작이다.
“친구끼리 하는 장난”이라는 핑계로 학교폭력을 자행하고, “다 너 잘되라고” 가정폭력을 휘두른다. 정당화 과정에서 약자인 피해자의 의견은 묻지 않는다. 정당화보다는 합리화에 가까운 이런 이유의 배경에는 가해자의 입장만 있을 뿐이다.
폭력은 피해자에게 씻기 어려운 상처를 남긴다. 드라마 <더 글로리>에서 학교폭력 피해자에게 남은 화상 흉터처럼 겉으로 보이지 않더라도, 마음 한 편에 트라우마로 자리잡는다.
수많은 연구결과가 입증하듯, 성장 과정에서 겪는 폭력은 정상적인 자아 형성을 어렵게 한다. 전북대 생활과학과 연구팀(지도교수 정혜경)에 따르면, 부모로부터의 직접적인 폭력 경험이나 부모 간의 폭력 경험이 많을수록 학교폭력 가해, 피해 경험도 많았다. 부모에 의한 폭력과 학교폭력 경험은 데이트 폭력 피해, 가해 경험과 유의미한 양의 상관관계를 보였다.
폭력은 또 다른 폭력을 낳는다. 성장기에 경험한 폭력이 ‘폭력 허용도’를 높이기 때문이다. 즉, 성장기에 학교폭력이나 가정폭력 경험이 많을수록 폭력에 수용적인 태도를 보인다.
체육계에서의 부조리가 근절되지 않는 이유도 엇비슷하다. 선배로부터 맞은 후배들은 폭력의 역치가 높아져 아무렇지 않게 다시 후배를 때리게 된다. 자아가 형성되는 청소년기에는 특히 그렇다. 또 체육이라는 종목 특성 상, 성별을 불문하고 ‘남성성’이 강조된다. 남성호르몬인 테스토스테론 수치와 폭력성은 유의미한 상관관계가 있다.
수십 년 전 이야기지만, 학교 유도부에서는 손톱 사이로 흐른 피가 흰 도복에 묻었다는 다소 황당한 이유로도 폭행을 당했다고 한다. 1년에 7~8번 정도는 선배들에게 3시간을 연속으로 맞았다고 한다.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1시간을 맞으면 맞을 힘도 없다고 한다. 2시간을 맞으면 이 사람이 시키는 건 뭐든지 할 수 있을 것 같고, 3시간을 맞으면 이 사람은 나에게 신이라고 한다.
인류와 폭력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지만, 사회에는 불필요한 폭력이 너무나도 만연하다. 나름대로의 오랜 고민 끝에 “강자인 가해자가 폭력을 정당화해서는 안된다”는 결론을 스스로 내렸지만, 여전히 강자와 약자를 구분하는 분명한 기준은 없다. 섣불리 가지게 된 신념이 폭력을 합리화할까봐 아직 조심스럽다. 그래서 틀린 걸 알면서도 그냥 “정당한 폭력은 없다”고 말하고 싶다. 정당한 폭력은, 어디에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