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장
“박제가 되어버린 천재를 아시오?”
이상의 소설 날개에 등장하는 유명한 첫 문장이다. 무력한 나날을 이어가는 주인공을 ‘박제된 천재’에 빗댄 이 문장은 소설가 이상의 천재성을 입증하는 문장으로 아직까지 회자되고 있다.
지난 27일(수), 배우 이선균이 사망했다. 그를 죽음으로 내몬 요소는 셀 수 없이 많다. 유흥업에 종사하는 여성의 협박과 공갈, 19시간에 걸친 경찰의 밤샘 조사, 무분별하고 잔인한 언론의 보도, 차일피일 미뤄지는 출연작의 개봉일과 불어나는 위약금, 그리고 죄책감과 수치심. 그의 감정을 모두 헤아려볼 수는 없지만 아마도 그런 것들이 아닐까 싶다.
그가 저지른 잘못보다 세상은 그에게 잔혹했다. 그의 비극은 유흥업소에서 일하는 협박범들이 故 이선균 씨에게 3억 5천만원을 요구하는 것으로 시작됐다. 상당한 금액을 내어주는 것으로 사건이 일단락되는 듯했으나, 이후 마약 범죄로 신고당한 협박범이 경찰 조사에서 이선균을 언급하면서 그의 치부는 세상에 드러났다.
10월 28일(토) 진행한 간이시약검사에서는 음성 반응이 나왔지만 경찰은 간이시약검사는 5~10일 이전에 마약을 투약한 경우 결과가 나오지 않는다며 국립과학수사연구원에 정밀 검사를 의뢰하겠다고 밝혔다. 이후 11월 3일(금), 경찰은 모발 100가닥을 채취해 정밀 검사를 의뢰했으나 모두 음성으로 판명됐다. 이후 11월 14일(화), 11월 24일(금) 각각 진행된 다리털과 겨드랑이털 검사 결과도 음성이 나왔다.
그러나 마약보다 대중의 흥미를 끌만한 소재가 보도됐다. 마지막 체모 검사에서도 음성으로 판명되고 경찰이 수사를 마무리할 것이라고 밝힌 당일, KBS1 ‘뉴스9’에서 故 이선균 씨와 유흥업소 실장의 통화 녹취록을 공개한 것이다. 마약과는 무관했던 짧은 녹취록에는 술에 취한듯한 목소리로 실장에게 마음을 고백하는 내용이 담겨있었다.
해당 보도 이후 KBS의 보도 행태를 비난하는 여론도 일부 형성됐다. 개인의 사생활을 지나치게 노출시키는 부적절한 보도라는 시각이었다. 그러나 그의 사생활은 짧은 시간 안에 대중의 공적 관심사로 자리잡았다.
그가 사망하고 나서야 KBS의 보도 방향은 본격적으로 뭇매를 맞았다. 이선영 MBC 아나운서는 故 이선균 씨가 사망한 당일 인스타그램에서 “故 이선균 씨 죽음과 관련해 고인이 어떤 마음이었는지 알 길은 없지만, 나는 KBS의 그 단독 보도를 짚고 싶다”고 밝혔다. 그는 “유흥업소 실장이라는 모 씨와의 통화에서 오고 간 은밀한 대화. 고인의 행동을 개별적으로 비난할 수는 있겠다. 하지만 그 보도가 어떤 사람의 인생을 난도하는 것 외에 어떤 보도 가치가 있었는지 모르겠다”며 선정적인 보도 양상을 지적했다. 다만 MBC의 보도 양상에 대해서도 비판이 거세지자 해당 게시글은 삭제됐다.
방송통신심의위원회에는 28일(목) 기준 2건의 민원이 접수됐다. 박찬대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김홍일 방송통신위원장 후보자(이하 김 후보자) 인사청문회에서 “이 씨 관련 보도가 최근 2,872건에 달한다고 한다. 언론이 이 씨의 사생활을 무차별하게 폭로했다는 것이 밝혀지고, 마약 사건과 직접 관련 없는 사적 대화가 나왔는데 이게 뉴스 가치가 있는 것인가”라고 반문하며, “KBS가 선정적 보도를 하고 있었다. 공영방송으로서 심각한 문제”라고 말했다. 김 후보자도 “뉴스 가치가 없다고 생각한다”며 “챙겨 보고 재발하지 않도록 할 수 있는 조치를 하는 게 옳다”고 문제를 시인했다.
대중의 공적 관심사라고 무조건 알 권리가 보장되는 것은 아니다. 보도 가치를 따질 때는 사회적 공익, 개인의 사생활, 대중의 알 권리, 피의자가 공정한 재판을 받을 권리 등을 종합해 가장 윤리적이고 합당한 판단을 내려야 한다. 기본적인 보도준칙도 지켜지지 않았다. 언론은 공판 청구 전 수사 중인 사건을 공공연히 보도했고, 한 개인의 명예를 실추시키는 것은 물론 공정한 재판을 받을 권리를 묵살했다.
그가 무슨 말을 하고 무슨 행동을 하든, 그는 마약 수사를 받고 있는 유흥꾼에 불과했다. 그에게 자기 자신을 받아들이는 일은 금지돼 있었고, 누구보다 가까워야 할 가족 앞에서도 살아있을 수 없었다. 그는 죽기 직전까지 유흥꾼으로 박제된 배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