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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을 향한 불편한 시선
기사 승인 2020-10-11 21  |  636호 ㅣ 조회수 : 719



가난을 향한 불편한 시선

장수연(산공·19)



  최근 기자는 TV를 보면서 매번 눈을 찌푸리고는 한다. 원인은 다름 아닌 후원단체들의 모금 광고 때문이다. ‘모금 광고를 보고 눈을 찌푸렸다’라고 한다면 대게 안타까움의 표현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기자가 느낀 감정은 안타까움보다는 불쾌함에 가깝다. 이 후원 광고들의 취지가 어떻든 간에 기자의 눈에 밟혔던 것은 이들이 후원대상들을 최대한 불쌍하게 보이도록 자극적으로 연출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미디어 연출을 소위 ‘빈곤 포르노’라고 부른다.



  실제로 해외의 한 방송에서는 에티오피아의 식수난을 촬영하러 갔다가 생각보다 물이 깨끗하자 아이에게 오염된 물을 마시게 한 사건이 있었다. 또 아동노동현장을 고발하는 영상을 찍기 위해 베트남 아이들을 억지로 물에 빠뜨리며 촬영을 행한 사건도 있었다. 동정심 유발 콘텐츠를 위해 인권은 처참히 무시해버린 것이다. 심지어 영상 속에 등장하는 후원대상은 대부분 어린 아이들을 대상으로 이뤄진다. 문제는 이 아이들에게 어떤 자발적인 선택권이 있었는지도 불분명하다는 것이다. 자신이 영상 속에 어떤 이미지로 비춰지는지, 어떤게 옳은 선택인지 제대로 된 판단력도 갖추지 못하는 나잇대이다. 아이가 영상에 동의를 했다고 해도 이는 제대로된 동의라고 할 수 없다. 근데 그런 아이들이 고통 속에 몸부림치는 순간을 찍어 매체에 공개적으로 박제시키는 것은 학대와 다름없는 잔인한 행위이다.



  그러나 기자가 빈곤 포르노의 인권 유린적 행위보다 더 크게 문제 삼는 것은 영상 속 인물을 철저히 동정의 대상으로만 연출한다는 점이다. 빈곤 포르노 속 동정의 시선은 타자화된 시선이다. 그 속에 상대와 동질화되는 시선은 보이지 않는다. 가난한 이들을 자신과는 다른 세상의 사람으로만 보는 것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누군가는 가난하게 살아간다. 그게 빈곤 포르노 속에 자주 나오는 지구 반대편 개발도상국의 사람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다. 가난은 우리와 매우 가까이에, 어쩌면 자신조차도 누군가에게는 동정의 대상이 될 수 있다. 사람들은 마치 가난과 빈곤을 마주하기 힘든 불편한 세상의 일인 것처럼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가난도 우리가 살아가는 같은 세상 속의 일이다. 빈곤 포르노 속의 사람들도 우리와 똑같은 세상을 살아가고, 똑같은 감정을 느끼는 사람이다. 빈곤 포르노 속 가난은 언제나 우울하고 슬프게 연출된다. 가난은 곧 불행이라는 단순한 공식만을 주입시킨다. 하지만 그들도 같은 사람으로서 그 속에서도 행복할 수 있는 존재임을 보여주지는 않는다. 물론 가난이 좋은 것이라는 뜻은 아니다. 그러나 상대가 원치 않는 억지 시선이라면 거둘 필요가 있다.



  후원단체들이 말하는 것처럼 가난은 없어져야할 사회적 문제임은 분명하다. 아이들이 굶어가고, 아파도 병원을 가지 못하는 것처럼 가난으로 인해 유발되는 상황들은 가슴 아픈 일이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가난은 절대 없어지지 않는 문제이기도 하다. 해결할 수 없는 문제라면, 영원히 우리와 함께 잔존할 문제라면, 어설픈 동정의 위로보다는 함께 아파하는 것이 먼저 아닐까? 우리에게는 가난을 동정할 권리가 없다는 것을 알아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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