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뿌리 깊은
나무의 열매
박수겸 (MSDE·21)
기자는 어렸을 때부터 힙합 음악을 곁에 둔 채 자랐다. 어렴풋이 기억나는 초등학교 1학년 때, 어머니가 옷을 입혀주시고, 등교 전 아침밥을 먹을 때면 어머니의 MP3에선 지드래곤의 「하트 브레이커」가 흘러나오던 것이 기억이 난다. 좀 더 자라 직접 컴퓨터를 만질 수 있었을 땐 긱스와 배치기 노래를 다운받아서 주야장천 듣곤 했다.
지금 생각하면 멜로디가 좋아서 들었을 뿐 힙합에 매력을 느껴서 듣진 않았던 것 같다. 그래도 어린 나이에 남들보다 힙합에 귀가 먼저 뜨여서 인지는 몰라도 중학교 1학년 때 우연히 텔레비전으로 보게 된 음악 프로그램 <쇼미더머니4>를 계기로 힙합에 관심을 두게 됐고, 그때부터 힙합에 빠져 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그저 빠른 랩이 멋있었고, 열기 넘치는 공연 문화에 반했다. 과장을 조금 보태자면 그땐 자는 시간 빼고는 힙합 음악만 듣고 있었다. 주말에는 부모님을 졸라 홍대에서 크고 작게 열리는 힙합 공연 티켓을 구매해 보러 갔고, 용돈이 모이면 앨범을 구매하는 등 열렬히 문화를 누렸다. 사실 기자는 이때까지만 해도 이렇게 힙합을 오랫동안 사랑할 줄 몰랐다.
하지만 어느 날부턴가 음악의 가사와 래퍼가 전달하고 싶은 메시지에 주목하게 됐는데 그때부터 진정 힙합을 사랑하게 되지 않았나 싶다. 원래 기자는 잔잔하고 감성적이면서 자전적인 이야기를 담은 노래는 신나는 분위기를 깨고 기분을 우울하게 만든다는 생각에 배제하는 경향이 있었다. 하지만 결국 감성적이고 자전적인 음악이 다른 음악분야와 대비되는 매력이 있다는 것을 느꼈다. 어찌 보면 힙합 음악의 가사는 가수 본인이 작사해 이야기한다는 점에서 책과 닮아있다. 책을 읽으면 책을 쓴 사람이 말하고자 하는 생각이나 사상을 전해 들을 수 있는데, 힙합도 그렇다. 그런 면을 보고 힙합에 더욱 빠졌다.
힙합 음악은 다른 음악 장르와는 다른 특징이 있다. 자전적인 이야기가 가사의 소재가 되고 래퍼는 라임과 플로우를 이용해 듣는 재미를 줘 음악을 만든다. 다른 음악보다 사람들의 감정을 어루만지고 공감하는 데 특화돼있다고 볼 수 있다. 이런 특징으로 한국에서 힙합 문화는 신촌과 홍대 인근 대학생들로부터 수입돼 깊게 뿌리를 내렸다. 다소 마이너하지만 마니아들이 계속 이어가던 힙합문화가 전무후무한 위기를 맞게 된다. 바로 코로나-19의 대유행이다.
코로나-19 유행 이전, 여러 방송국과 래퍼들 그리고 문화를 누리는 마니아들의 노력으로 힙합이 언더그라운드에서 음악계의 주류 궤도로 안착했다. 처음에는 부정적이고 폭력적인 음악으로 받아들여지던 힙합이 시간이 지나 본모습이 대중들에게 알려지고 사람들에게 긍정적인 영향과 희망을 주고 있다는 점에서 대중문화의 한 축을 담당하게 됐다. 이때부터 힙합문화는 몸집을 키워 가요의 위치까지 올라 설 준비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현재 사회적 거리두기 정책의 여파로 기자의 여러 추억이 담긴 홍대의 소공연장들이 모두 폐업하거나 폐업 위기를 겪고 있다. 홍대에 있던 규모 있는 공연장은 이미 한군데를 빼고 모두 폐업했다. 대중적이고 훌륭한 음악을 만드는 래퍼들이 꿈을 키우는 ‘뿌리’역할을 했던 홍대와 신촌은 텅 빈 거리만이 남아있다. 기자는 이제 홍대에서 예전의 추억을 찾기 힘들어졌다. 기자는 힙합에 긍정적인 영향을 받고 자란 ‘힙합 키드’로서 이 문화를 지켜나가고 싶다. 갓 스물의 패기로 보일 수도 있지만, 지금까지 기자의 삶에서 힙합이 준 영향을 생각한다면 기자가 하는 말이 결코 객기로 보기는 힘들 것이다. 코로나-19의 끝이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기자는 추억을 잃게 됐지만, 아직 버티고 있는 정부로부터 외면받은 인디 문화와 언더그라운드 문화를 지키는 데 도움을 주고 싶다. 작은 바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