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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르는 것을 알려고 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김정은 ㅣ 기사 승인 2021-10-18 15  |  651호 ㅣ 조회수 : 236



모르는 것을 알려고 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김정은 (건시공·16)



  “그거 몰라도 살아가는 데는 아무런 지장 없어.” 언제부턴가 바이러스처럼 우리 사회 곳곳에 만연하기 시작한 풍조가 있다. 일명 ‘반지성주의’라고 불리는, 몰랐던 사실과 맞닥뜨렸을 때 그것을 과잉 정보 취급하며 강한 거부반응을 보이는 현상이다. 가볍게는 눈앞의 오락과 감상에만 잠기기 급급하고 사유와 대안을 기피하는 태도가 이에 해당한다. 하지만 이는 나아가 학문 자체를 폄하하고 때로는 혐오와 손을 잡기도 한다. 기득권층이 지위 유지를 위해 특정 사안에 대해 적극적으로 모르고자 하는 편향적 태도를 보이는 것이 이 경우이다.



  전부터 온라인 커뮤니티에서는 때때로 ‘아날로그 시계 보는 법’ 등으로 상식의 기준에 관한 논쟁이 불거진 바 있다. 이는 지난해 ‘사흘’이라는 단어가 포털 사이트 실시간 검색어 1위를 차지하며 그 민낯을 드러냈다. 정부 시책에 명시된 ‘광복절부터 사흘 연휴’라는 표현을 두고 “3일을 쉬는데 왜 사흘로 표기하냐”라며 갑론을박이 벌어진 것이다. 이에 네티즌들은 오해의 소지를 낳았다며 정부의 잘못으로 책임을 전가하는 논지로까지 나아갔다.



  이러한 현상에서의 공통점은 자존심에서 기인한 분노였다. 마치 몰랐다는 사실을 수긍하면 본인 삶에 극단적 변화가 일어나기라도 하는 것 마냥 되레 감정적인 표출을 하는 것이다. 하지만 기자는 “정보를 몰랐다”라는 기술적 ‘사실’에서 그것이 옳거나 옳지 않다는 ‘가치판단’을 하는 것 자체가 성립할 수 없다고 본다. 그것은 자연주의적 오류이다.



  일단 모르는 것 자체는 전혀 문제가 아니다. 인간의 무지는 필연적이다. 누구나 태초에는 아무것도 몰랐고 살아가면서 정보를 다양한 방법으로 축적한다. 역사와 함께 누적된 지식은 무한하지만 인간은 수명은 유한하므로 모르는 상태는 당연히 지속될 수밖에 없다.



  하지만 모르는 것과 ‘알려고 하지 않는 것’은 다르다. 무지를 대하는 이러한 태도는 경계해야 할 필요가 있다. 동서양을 막론한 위대한 철학자들조차 앎에 있어 끊임없이 자문하는 겸손한 태도를 보였다. 공자와 소크라테스 모두 “모르는 상태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고 한다. 기자는 요즘 우리 사회 모습이 현인 소크라테스를 ‘괴질’ 취급하며 탄압했던 아테네인들과 닮아있다 생각했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지를 어떻게 마주해야 할까. 세계적인 기타리스트 앤서니 웰링턴은 기타를 마스터하기까지 의식이 4단계를 거친다고 설명한다. 기자는 이 짧은 강연 영상을 인상 깊게 봤고 특정 분야에서 정체기를 겪을 때 종종 이 단계를 상기한다. 여기서의 무지는 나아가기 위한 일시적 과도기일 뿐이다.



  첫 번째 ‘무의식적 무지’, 자신이 모르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단계이다. 두 번째로는 ‘의식적 무지’, 이 단계에서 사람들은 자신의 부족한 지식을 체감하게 된다. 세 번째는 ‘의식적 지식’, 어느 정도 지식이 쌓였음에도 자신의 실력을 끊임없이 객관화해 점검한다. 마지막으로 ‘무의식적 지식’, 지식이 완전히 자신의 것으로 체화된 상태이다.



  앤서니 웰링턴은 배움의 희열을 느낄 수 있는 때는 첫 번째 ‘무의식적 무지’ 단계와 마지막 ‘무의식적 지식’ 단계밖에 없다고 말한다. 첫 번째 단계에서 재미를 느낀 많은 이들이 보통 두 번째 단계에서 자신의 한계를 자각하고 좌절하며 다음 단계로 나아가지 못한다고 한다. 어찌 됐든 자신의 상태를 의식적으로 자각하면 기분이 유쾌하지만은 않다는 것이다. 하지만 거기서 나아가려는 태도가 지니는 것과 그저 감정적 대응으로 그치고 마는 것은 다르다. 당장의 수준은 비슷해보일 수 있으나, 시간이 흐른 뒤 어떤 방면으로든 분명한 질적 차이가 있을 것이다.



  우리 사회의 불확실성이 짙어짐에 따라 사실과 진실의 권위가 무너지고 ‘반지성’과 ‘탈진실’의 시대가 도래했다. 미디어에서 가짜 뉴스와 허위정보가 범람하고, 정치에서 포퓰리즘이 민주주의를 잠식하며, 사회적으로 혐오가 만연한 것이 이와 같은 맥락일 것이다. 지식이 비즈니스가 된 사회일지언정 개인이 지성의 힘을 잊어버려선 안 된다. 알고 싶은 정보만 취사선택하는 편향성은 개성으로 치부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무지를 수긍하자. 기자는 이런 개인적 태도가 뒷받침될 때 사회가 반지성주의에 반하며, 탈진실을 탈피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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