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이라는
네버랜드에서
노승환 (안전·17)
어느 날 유튜브에서 희생에 관한 내용을 『피터팬』 얘기를 통해 설명하는 조던 피터슨의 강의를 보게 됐다. 어렸을 때 『피터팬』은 그저 재밌는 동화인 줄 알았는데, 그 강의를 듣고 다시금 『피터팬』에 대해 생각해보게 됐다. 『피터팬』에서 피터팬은 자라지 않는 마법의 소년이다. 아이는 무엇이든 될 수 있는 잠재력이 있고, 피터팬은 그 잠재력이라는 마법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그는 철없는 아이로 남는 걸 선택하고 네버랜드에 있는 소년들의 왕이 되지만 그 대가는 참혹했다. 그는 가족을 꾸릴 기회도, 삶의 유한성에서 오는 가치도 포기해야만 했다.
성숙해지기 위해선 희생이 필요하다. 다시 말해 젊음의 잠재력을 희생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희생을 해야 할까. 희생이 동반되든 아니든 시간이 가는 것은 불가피하기 때문이다. 희생하거나 혹은 그대로의 삶을 유지하고 나중에 그 업보가 본인을 덮치게 두는 두 개의 선택지뿐이다. 사람들은 성숙해짐을 늦춤으로써 지금 당장의 고통을 피하려 한다. 하지만 이로 인해 고통은 오히려 쌓이게 되고 때가 되면 거대해진 고통은 본인을 부수게 된다.
어리고 미숙한 시절에는 무지가 당연하다 여겨지며 대부분의 이들도 그것을 인정한다. 그러나 30살이 넘어가고 사람들은 여전히 아무것도 모르는 당신에게 더 이상 관심이 없어진다. 그저 늙은 영아로 취급할 뿐이다. 아이로 남는 것의 가장 큰 문제점은 잠재력밖에 없다는 것이다. 뭐든 될 수 있지만 바꿔 말하면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라는 것이다. 네버랜드와 팅커벨이라는 존재하지 않는, 진짜의 대체품에 불과한 것들에 의지하며 살아가는 피터팬처럼 말이다. 이를 두고 만들어진 ‘피터팬 증후군(Peter Pan Syndrome)’이라는 심리학 용어도 존재한다. 피터팬 증후군의 증상은 신체적으로는 어른이 됐지만 그에 따른 책임과 역할을 거부하고 어린아이의 심리 상태에 머무르는 것이다.
희생하지 않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에 우리 모두 무엇을 희생할지 결정해야 한다. 대학생인 지금이 가장 중요하다고 볼 수 있다. 현재 우리나라는 무엇이 되기 위해 대학에 가는 사람보다는 아무것도 되지 않기 위해 대학을 가는 사람이 훨씬 많은 실정이다. 바꿔 말하면 꿈을 찾으러 대학에 가는 것이 아닌 그저 점수에 맞춰서 대학을 가는 사람이 더 많은 것이다. 대학은 더 이상 지식의 상아탑이 아닌 네버랜드가 된 것이다. 그들은 자신의 미래가 빼앗긴 줄 모르고 자아를 찾는 중이라고 자아도취에 빠진다. 기자 역시 그런 사람 중 한명이었다. 가끔 피터팬처럼 영원히 어린 아이로 남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대학이라는 네버랜드는 졸업이란 끝이 있기 때문이다.
대학에 입학한지 엊그제 같은데 어느새 시간이 흘러 2021년도 끝이 보인다. 어렸을 때 『피터팬』에서 후크 선장은 왜 악어를 무서워하는지 궁금했던 적이 있다. 그에게는 악어를 잡기 위한 충분한 무기와 병력이 있었는데도 말이다. 악어가 후크 선장의 시계를 먹고 나타날 때마다 후크 선장이 공포에 떨었던 것은 악어가 아니라 시계 소리, 즉 시간이 흘러간다는 공포에 떨면서 살았다는 걸 이제는 이해한다. 시간이 흘러가고 나이를 먹는 것은 너무나 두려운 일이지만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새로운 일을 시작하기 위해서는 시간이 흘러가야 한다는 것도 안다.
성인이 됐다는 의미는 내가 무엇을 희생해야 하는지 알아야 하고 결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어린아이로 남아서 노는 것은 여전히 재밌을 수밖에 없다. 허나 당장의 희생을 피하고 고통을 느끼지 않는 것은 잠시뿐이다. 존 셰드는 “배는 항구에 있을 때 가장 안전하다. 그러나 그것이 배의 존재 이유는 아니다”라고 했다. 이 말처럼 사람은 어린아이일 때 눈부신 잠재력과 함께 빛나지만, 잠재력만 가진 어린아이로 남는 것이 사람의 존재 이유는 아니다. 우리 모두 본인이 희생할 것을 찾고 그 과정에서 몰입하는 즐거움을 찾아내며 성숙해져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