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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젯밤 마녀가 죽어야만 했던 이유
기사 승인 2021-10-04 18  |  650호 ㅣ 조회수 : 508

어젯밤 마녀가 죽어야만 했던 이유



  우리의 일상은 얼핏 지루한듯 싶다가도 사실 크고 작은 사건들로 요동치고 있다. 삶의 파도를 타다보면 휘청거리는 사이 옆에 있던 누군가를 치고 가기도 하고, 간절한 구조요청을 외면해야만 내가 살아남을 수 있는 순간도 온다. 보통의 인간은 그럴 때 죄책감이란 감정을 가진다. 그리고 죄책감을 덜어내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것을 나보다 더 죄가 많은 타인에게 전가하는 것이다. ‘우리를 괴롭게 만들었던 모든 일은 사실 저 마녀로부터 기원한 것이야.’ 마녀가 재판장으로 향하는 걸음마다 우리의 죄책감은 가벼워진다.



  <죄 많은 소녀>는 한 여자 고등학교를 배경으로 해 타인에게 죄책감을 전가하려는 인간의 모습을 적나라하고 건조하게 드러낸다. ‘경민’의 자살 이후 인물들은 ‘누가 경민을 죽게 만들었나’를 두고 씨름한다. 학교는 최대한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경민이 원래 우울했던 기질이 있던 사람으로 취급하고, 경찰은 사건 해결만을 목적으로 친구였던 ‘영희’를 들볶고, 경민의 어머니 역시 딸의 자살을 영희가 종용했다고 믿고 싶어한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경민이 죽기 전 경민의 이야기를 들어줬던 사람은 그 누구도 아닌 영희뿐이었다. 여기서 한 가지 생각해볼 것은 경민은 과연 죽기 전 이러한 자신의 마음을 영희에게만 드러냈을지에 대한 의문이다. 어쩌면 경민은 살아있던 내내 계속 소리치고 있었지만 영희를 제외한 이들은 아무도 그 목소리를 들어주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살아있는 경민의 목소리를 묵음처리한 주변인들은 경민이 죽고 나서야 그녀를 사지로 내몬 ‘범인’을 찾으려한다. 경민의 죽음의 원인이 자신에게 없어야만 자신은 죄가 없는 선량한 시민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모두의 죄책감을 대신하게 된 영희는 그렇게 마녀가 돼 재판장에 선다.



  그런 영희의 입장은 영희가 경민의 장례식장에서 자살시도를 함으로써 바뀐다. 사람들은 영희의 행동이 경민을 잃은 슬픔으로부터 비롯됐으리라 넘겨짚고, 영희의 결백을 인정한다. 영희가 ‘목소리’를 잃어버린 것은 상당히 중요한 설정이다. 영희에게 날카로운 화살촉을 겨누던 사람들은 영희가 더 이상 말할 수 없는 상태가 되고 나서야 그녀에게 호의적으로 변한다. 마치 경민이 죽음으로 발언권을 잃었을 때야 비로소 그녀의 이야기를 궁금해 했던 것처럼. 아빠는 친절해졌고, 어른들은 영희를 더 이상 혼내지 않고, 친구들의 괴롭힘도 멈췄다. 언뜻 보면 그 전에 비해 상황이 영희에게 긍정적으로 흘러가는 것 같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사람들은 여전히 영희를 궁금해하지 않는다. 학교에 복귀한 날 자살을 암시하는 영희의 수화를 아무도 알아듣지 못한 장면이 그 사실을 명시한다. 영화는 끝까지 경민의 서사를 풀어주지 않는다. 그러나 영화 말미 식사 장면에서 영희의 대사를 통해 경민과 영희가 공통으로 원하던 것이 무엇이었는지를 알 수 있다. “내일이면 내가 왜 죽었는지 사람들이 물어볼 거예요” 분명한 건 그들이 원했던 것은 마녀 사냥이 아니었다.



  영화 결말부에서 영희는 경민이 죽던 날 함께 걸었던 다리를 홀로 걷는다. 자신이 늘 계획했고, 경민이 실행했던 자살 장소로 향하는 것이다. 콧노래를 부르며 걷던 영희는 어느 한 지점에서 멈춰서더니 뒤를 돌아볼까 망설이다가, 결국 다시 앞을 보며 걸어간다. 점점 멀어지는 영희의 뒷모습을 보며 관객은 그녀의 죽음을 예상하게 된다. 내일이면 영희가 왜 죽었는가에 대해 사람들이 물어볼 것이다. 이 영화를 보지 않은 이들은 영화를 본 관객들에게 물어볼테다. 그러나 이 영화를 제대로 보고 느낀 관객이라면 더 이상 죄 많은 소녀를 만들 수 없을 것이다. 어떤 관객이 영화를 보며 생겨난 죄책감을 쉽사리 마녀에게 전가하지 못했다면, 그것만으로 <죄 많은 소녀>는 성공작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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