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사소개 l 공지사항 l PDF서비스 l 호별기사 l 로그인
해방, 그리고 추앙
기사 승인 2022-05-09 11  |  659호 ㅣ 조회수 : 423

  해방, 그리고 추앙



  백재완 (기자차·18)



  세상에는 여러 부류의 인간이 존재한다. 그중에는 ‘혼자’인 게 편한 사람들도 분명히 존재한다. 모든 관계가 노동처럼 느껴지는 사람. 다른 사람과 시간을 보낼 때 에너지가 쉽게 소모되는 사람. 새로운 사람을 만날 때마다 긴장하고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안절부절못하는 사람. 우리는 흔히 그러한 사람을 내성적인 사람이라고 한다. 현대 사회가 전보다 아무리 다양성이 존중되는 사회가 되었다고 할지라도, 외향성을 추구하는 사회생활에서 내성적인 성격이 불리하게 작용할 수 있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어릴 때 자신이 내성적인 사람이라고 느끼는 것보다 주로 대학교 와서 또는 직장생활을 하며 자신이 내성적인 사람이라는 것을 더 많이 느낄 것이다. 전 세계 인구의 절반가량은 내성적인 사람들이라고 한다. 그리고 외향성과 내향성을 모두 가진 ‘양향성격자(Ambivert)’라고 정의되는 사람들도 있다. 이는 심리학자 카를 융(Carl Gustav Jung)이 언급한 개념으로 외향성과 내향성을 유동적으로 오가는 특성을 말한다. 그렇지만 우리 주변에는 내성적인 사람보다 외향적인 사람이 더 많아 보일 것이다. 왜냐하면 내성적인 성격이 직장 혹은 팀플레이를 하는 데 있어서 단점으로 부각되는 경우가 많아 감추고 싶어 하며, 자신의 내성적인 성격을 고쳐야 하는 단점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회식 및 술자리나 친구끼리의 관계에 있어서 분위기를 잘 띄우고 활발한 사람이 인기가 많고 사랑받는다.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 때문일까, 간혹 내성적인 사람들은 외향적인 ‘척’ 연기를 하며 내성적인 성격은 감추고 싶은 콤플렉스가 된다. 일부러 활발한 척, 사교성 있는 척. 그리고 억지 리액션과 사람들을 웃기려고 하는 애를 쓴다. 행복해지면 사교적이어야 할 것 같으니까. 친구 많고 인기 많으면 좀 있어 보이니까. 그래야 할 것 같으니까. 하지만 과연 그게 진정한 행복일까. 나는 그 사람들이 이 사회적 분위기가 만들어낸 보이지 않는 속박에서 ‘해방’되길 바란다. 그리고 서로 ‘추앙’하길 바란다.



  ‘해방’과 ‘추앙’이라는 단어는 얼마 전에 보았던 ‘나의 해방일지’라는 드라마에서 사용하는데 여기서 영감을 얻었다. 두 단어가 주는 느낌이 일상에서 잘 사용하지 않는 단어라 다소 낯설고 어색하게 여겨질 수 있다. 특히 ‘추앙’이라는 단어는 더욱 그러할 것이다. 하지만 ‘추앙’이라는 단어에 내포된 힘은 어마어마하다. 누군가가 나를 조건 없이 지지해주는 것, 추앙. 거창해 보이지만 그러하기에 더욱 이 단어가 의미 있게 느껴진다고 생각한다.



  누군가 온전히 현재의 나로서의 모습을 응원해 준다는 것이 얼마나 살아갈 힘을 주는지 상상해보자. 특히 현대 사회의 인간관계에 지치고 한 번도 채워진 적 없고, 거지 같은 인생에, 거지 같은 인간들, 다들 잘난 척, 무례하고 아무렇게나 쏟아내는 말을 들으며 힘들게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정녕 필요한 건 위로가 아닌 추앙이지 않을까.



  내성적인 사람들은 마음이 편하지 않은데도 그들의 시선이나 평가에 신경 쓰면서 억지로 애쓰고 맞춰주다가 지쳐버린다. 쓸데없는 말이지만 그걸 알고도 받아줘야만 하는 그런 때, 그래서 결국 그 노동에 지쳐 살다 보면 언젠가 ‘진짜의 나’는 없어지고 누군가의 칭찬과 인정에 맞춰진 ‘가짜의 나’만 남게 되는 ‘나’를 발견하게 된다. 누군가의 너무 쉽게 내뱉고 행동하는 그 하나하나에 ‘나’는 상처투성이가 될 것이며, 그 무례를 또 아무렇지 않게 저지를 것이다. 그리고 내성적인 그들은 그것에 대항하지 못하고 그냥 넘어가며 화를 참을 것이다. 하지만 그 분노는 너무 정당하다. 너무 정당한 이 분노를 매번 꾹 눌러야 하는 것도 노동이다. 그런 노동 속에 ‘나’는 어떻게 해방될 수 있을 것인가.



  인생에서 ‘해방’되고 싶다는 말, 공감되는가. 어디에 갇혔는지는 모르겠지만, 꼭 갇힌 것 같은 그런 기분이 든 적이 있는가. 그렇다면 ‘추앙’해보자. 쌍방의 추앙을 통해 누군가가 나의 존재를 들어주고 높여주고 나 역시도 그러하다 보면 언젠간 그러한 인간관계 속에 행복과 평온함을 찾아 해방될 것이라 믿는다.


기사 댓글 0개
  •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댓글쓰기 I 통합정보시스템, 구글, 네이버, 페이스북으로 로그인 하여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확인
욕설, 인신공격성 글은 삭제합니다.
[01811] 서울시 노원구 공릉로 232 서울과학기술대학교 I 최초발행일 1963.11.25 I 발행인: 김동환 I 편집장: 김민수
Copyright (c) 2016 SEOUL NATIONAL UNIVERSITY OF SCIENCE AND TECHNOLOGY.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