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때 우리의 삶 속 의문들은 부조리와 의문의 삶을 영위하는 주체인 ‘나’를 중심으로 처리되므로 대부분 ‘나’에 관하도록 귀결된다. 동시에 그러한 의문들은 종국엔 “나는 누구인가”와 같은 본질적 질문으로 외연을 좁혀나간다. 결국 ‘나’를 둘러싼 모든 의문들은 나 자신을 분명히 앎으로써 답변될 수 있는 셈이다. 또 그러한 자신의 존재에 대한 근원적 탐구는 자주 ‘부모’를 경유해 이루어지는데, 모든 생명의 존재는 필수적으로 생물학적 탄생을 전제하기에 자신의 존재론적 본질에 대한 탐구 역시 그곳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이 보편적인 까닭이다. 프로이트가 주장했던 ‘가족 로망스’ 이론 역시 자신의 근원적 탐구에 자주 ‘부모’가 소환되는 지점과 맞닿은 면이 있다. 가족 로망스란 자신을 왕자, 내지는 공주로 생각했던 아이들이 성장하면서 자신의 부모가 왕과 왕비가 아니라는 현실을 깨닫지만, 되레 현실의 부모를 부정하면서 어딘가에 왕과 왕비인 친부모가 있을 것이라 생각하며 자신의 환상을 고집하는 현상을 말한다.
이러한 가족 로망스는 현대에서도 유효하게 작용하고 있다. ‘금수저’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이는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난 아이를 뜻하는 신조어이며, 반대로 가난한 가정의 아이는 흙수저를 물고 태어났다고 표현된다. 해당 표현은 자본주의 사회 속 계급 구도를 선명히 만들고 그 사이의 갈등을 심화시킨다는 점에서 문제적이다. 현대의 가족 로망스는 바로 그 문제적 단어의 형태를 빌려 이루어지고 있다. 소위 ‘흙수저’로 명명된 저소득층의 아이들이 “나도 금수저였으면 좋았을텐데”와 같이 생각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는 자신의 가난한 친부모를 제 기원으로 보는 것의 거부와, 부유한 부모님에 대한 환상을 동반하는 사회적 문제이다. 이와 같은 사회에서 김애란의 소설 「달려라 아비」를 읽는 것은 유의미한 경험이 될 수 있다.
작중 주인공인 ‘나’는 사생아이다. 어머니가 ‘나’를 낳기 하루 전날 아버지가 도망쳐버리고 다신 돌아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아버지이지만, ‘나’는 종종 아버지를 상상한다. 이상하게도 그럴 때마다 상상 속 아버지는 꼭 어딘가를 향해 달리고 있다. 다만 보편적인 가족 로망스 구도와 달리 ‘나’는 아버지의 부재라는 현실을 부정치 않고 인식하고 있다는 점이 주목할 만한 차이점이다. 다시 말해 화자는 현실 속 의문 직시의 일환으로 아버지의 외양을 상상하고 있다.
작중 외할아버지는 홀로 아이를 낳은 어머니를 탐탁치 않아한다. 하루는 그런 할아버지가 ‘나’에게 “니가 누구 딸이냐”하고 물으신다. 이에 ‘나’는 큰 소리로 “조자옥이 딸이오!”하고 답한다. 자신의 기원으로 엄마인 ‘조자옥’만을 꼽는 근원 탐구적 발화에서는 아버지가 부재한 현실을 인식함과 동시에 어머니를 자신의 기원으로 분명히 여기는 화자의 태도가 드러난다. 즉 ‘나’는 아버지를 자신의 생물학적 기원으로 보는 것엔 거부하지만, 그 대상에 대한 의문과 상상은 멈추지 않음으로써 어머니와의 의지적 삶을 관철하는 것이다. 비록 실존하지 않는 아버지의 모습을 그리고는 있지만, 자신의 친부모가 왕과 왕비가 아님을 인정할 수 없어 그들을 자신의 기원으로 바라보는 것을 부정한다는 기존의 가족 로망스 양상과는 크게 다르다. ‘나’는 달리는 아버지의 환상을 통해 자신의 현실 세계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긍정하고 있다.
반면 현대 사회 속 가족 로망스는 자신을 둘러싼 모든 의문의 해답을 친부모의 경제적 열등에서 찾게 만드는 식으로 이루어진다. 이는 사회적 현상이 아이들에게 야기한 자기파괴적 환상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지점에서 김애란의 「달려라 아비」는 다시 읽힐 필요가 생긴다. 제 삶을 둘러싼 의문을 회피하지 않고 직시함으로써 역설적으로 모든 의문들을 타개해 나가는 ‘나’의 태도는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들이 본받을만한 것이다. 의문 직시를 비롯한 일련의 행위들이 곧 행복하고 희망찬 삶의 첫걸음이 되어주리라 기대해 본다.
※ 투고 학생의 요청에 따라 익명으로 게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