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국 대학의 한 페이지, 공릉 캠퍼스
정준영(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교수)
11월 중순, 가을이 저물어가는 계절이다. 단풍으로 물든 대학교정이 겨울을 앞두고 아름다움의 절정을 뽐내는 시기이기도 하다. 서울과학기술대학교의 캠퍼스도 이 무렵에는 단풍으로 황홀하다. 정문 부근의 은행나무길, 붕어방 주변의 산책로는 ‘전국구’의 명성까지는 아니지만, 주변 시민들의 산책명소로 자리 잡은 지 이미 오래다. 공릉 캠퍼스는 서울 소재의 대학 캠퍼스 중에서도 넓은 부지와 쾌적한 건물조성, 아름다운 자연경관으로 단연 돋보이는 존재 중 하나라고 하겠다. 15만평이 넘는 캠퍼스 부지는 서울대, 연세대, 고려대, 이화여대 등 역사 깊은 대학 캠퍼스와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로 넓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 주목되는 특징은 입지조건이다. 서울에 소재한 대학 캠퍼스 중에서 이 공릉 캠퍼스만큼 평탄한 평지에 자리 잡은 대학이 있을까? “언덕 위의 캠퍼스”라고 해서, 대학교정은 모름지기 주변 지역에서 고립된 지점, 우뚝한 지형에 자리 잡는 것이라 생각하는 일반적인 통념, 실은 미국대학 특유의 캠퍼스 관觀과는 차별화된다. 대학 건물과 경계 없이 주변 지역과 뒤섞여 도심의 일부를 형성하는 유럽, 일본의 도심형 대학까지는 아니더라도, 공릉 캠퍼스는 다른 대학의 캠퍼스들과는 상당히 다른 특징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이 공릉 캠퍼스에는 다른 건물들과는 조금 달라 보이는, 낯선 양식의 학교건물들도 눈에 띤다. 오랫동안 대학을 상징했던 다산관과 창학관, 그리고 이 두 건물과도 또 달라 보이는 대륙관은 국가등록문화재로도 지정된 건물인데, 서울과학기술대학교의 역사와는 결이 다른, 공릉 캠퍼스만의 고유한 시간을 드러내는 흔적들로 남아있다. 여기서는 이 건물들을 단서로 삼아 공릉 캠퍼스가 품고 있는 배후의 역사들을 잠깐 더듬어 보겠다.
우선, 다산관과 창학관에서 시작해보자. 아마 역사에 큰 관심이 없는 이들이라도 이들 건물이 경성제국대학 이공학부에서 유래한다는 것 정도는 대략 들은 바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경성제국대학 이공학부란 어떤 학교였을까? “과학조선의 대전당.” 일제강점기의 관제신문 매일신문은 1941년 4월 경성제국대학 이공학부의 설치를 알리면서 이렇게 표제어를 붙였다. 식민지조선에 새로운 과학교육의 전당, 엔지니어의 산실이 완성되었다는 뜻이었을 것이다. 1926년 개학한 경성제국대학은 법문학부와 의학부 2개의 학부와 예비교육기관인 3년제 대학예과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여기에 이공학부가 추가된 것이다. 이과계열로는 물리학과와 화학과, 공과계열로는 토목공학과, 기계공학과, 전기공학과, 응용화학과, 광산야금과 등 총 7개의 학과로 구성되었다. 교육과 연구를 담당할 일본인 교수와 조교수 74명은 1941년과 1942년 ‘현해탄’을 건너 식민지로 건너왔다. 학생 정원은 40명이었는데, 입학생은 이미 1938년부터 선발되어 청량리의 대학예과에서 3년간 기초교육을 받은 후 1941년부터 학부로 진학하였다.
당시 식민지조선에는 경성고등공업학교를 중심으로 전문학교 수준의 공학교육, 이과교육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대학 졸업 수준의 고급 엔지니어 양성은 억제되었고 조선인과 일본인 사이의 기술적 위계는 대단히 확고한 것으로 남아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공학부의 창설은 최소한 표면적으로는 이러한 위계적 구분과 차별이 완화되었음을 알리는 상징적인 사건이 될 수 있었다. 이공학부는 식민지는 물론 일본 본토에서도 최고 학부라고 할 수 있는 제국대학에만 설립되었기 때문에 이러한 해석이 가능하다. 일본에서 제국대학은 학력경쟁의 정점으로서 우수한 학생들이 치열한 경쟁을 뚫고 들어가는 엘리트대학이었고, 거기를 졸업한 사람들은 국가 엘리트가 될 수 있는 여러 특혜를 사회적으로 부여받곤 했다. 이런 제도적 특권은 식민지에 있는 제국대학이라고 해서 다르지 않았다. 이공학부 설립을 계기로 조선인 학생들은 이제 일본 유학을 거치지 않고도 제국대학 공학부에 진학할 수 있게 되었다. 그렇다면 과연 조선인 졸업자들은 고급 엔지니어가 되어 조선인과 일본인의 위계구분을 깰 수 있었을까? 현재로서는 알기 어렵다. 이공학부는 불과 4년 남짓 존속했을 따름으로 본격적으로 졸업생을 배출하기 전에 해방을 맞이했다.
다음 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