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국 대학의 한 페이지, 공릉 캠퍼스
정준영(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교수)
[지난 호에서 이어집니다…]
제국대학은 교육기관 이상으로 연구기관의 성격이 강한 대학이었다. 제국일본 정부의 전폭적인 지원 아래 일본 본토 및 식민지와 관련된 다양한 분야의 지식생산을 거의 독점하는 역할을 맡았기 때문이다. 학술적 권위 또한 제국대학에 집중되었다. 이런 특징은 경성제국대학 이공학부에서도 현저히 드러났다. 학생은 매년 40명 정원으로 입학하는데 교수는 80명 가까이 재직했던 이공학부의 교수 학생 비율이 그 증거였다. 이공학부는 국가에 의해 설립된 관립 기관인 만큼 연구와 교육을 통해 ‘제국의 국책國策’에 기여해야 한다는 목표 의식도 뚜렷했다. 경성제국대학의 이공학부 창설은 일본 본토에서 활동하는 엘리트 자연과학자, 공학자들이 식민지 조선에 집결하는 계기가 되었다. 실제로 식민권력은 신설되는 이공학부가 “종합 이공학 연구소”로 발전함으로써 조선 이공학 연구의 허브가 되기를 바랐다. 일본 본토의 이화학연구소, 즉 리켄理硏은 이공학부 설립과정에서 주요한 참고 모델이 되었다. 공학부가 아닌 이공학부가 된 것도 이공학부가 단순히 고급 산업기술자를 양성하는 기관이 아니라 “공업의 기초적 및 응용적 연구기관”으로 자리매김하기 위해서는, ‘기초적인 지식을 공급하는 이화학적 연구’와 ‘그 응용으로 공업적 연구 및 기술적 실험’이 유기적으로 결합해야 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과학조선”의 건설은 결과적으로 제국일본의 대륙병참 기지로서 식민지 조선이 가진 국책적 위상을 드높이는 데 기여할 것으로 확신했다.
식민권력의 이러한 기대가 더욱 극단적으로 드러나는 증거가 바로 이 공릉 캠퍼스였다. 조선총독부는 신설될 이공학부를 오늘날 대학로에 있었던 경성제국대학의 기존 캠퍼스와는 다른 곳에 설치하기로 했기 때문이다. 1938년 9월부터 캠퍼스 부지 선정 작업에 착수해서 1940년 1월 공덕리 일대 16만평의 부지가 선정되었다. 이곳은 당시에는 경성부, 즉 서울이 아니라 경기도에 속해 있었던 양주군 노해면에 해당되는 땅이었다. 당시 돈으로 500만 엔이 넘는 거액의 예산이 투여된 대사업이었다. 캠퍼스에는 총 4개 동의 건물이 건축되었는데, 그 중심은 물리학과, 기계공학과, 전기공학과가 사용했던 1호관과 화학과, 토목공학과, 광산야금과가 사용했던 2호관이었다. 지금의 다산관과 창학관이다. 특히 창학관의 설립은 당시 식민지 조선에서 “조선총독부와 반도호텔에 이어 제3위의 큰 건물”로 불릴 정도로 큰 사업이었다. 1937년 시작된 중일전쟁이 단기전으로 끝나리라는 예상과는 달리 진흙탕에 빠져서 모든 물자가 부족해져갔던 당시 사정을 감안할 때, 상당히 파격적인 지원이라 하겠다. 그만큼 식민권력의 입장에서 이 사업이 절실했다는 증거이다.
캠퍼스를 외딴 공릉으로 선정했던 것도 이런 절실함과 무관하지 않다. 공덕리 일대는 경춘선 및 경원선과 지리적으로 가까웠을 뿐 아니라, 1939년 광산전문학교가 이미 자리 잡은 상태였기 때문에 운영의 묘를 살리기 좋은 장소라는 점이 작용했다. 식민지 조선의 과학기술력을 이곳에 집중시켜 고급 인력 및 기술 양성을 체계적으로 구축하고 이를 기반으로 북으로 이어지는 철도를 기반으로 대륙병참기지의 역할을 다하면 어떨까? 대륙관은 경성광산전문학교의 본관 건물이지만, 다산관, 창학관과 한 덩어리를 이루어 ‘공업조선’이라는 식민권력의 환상을 구현하는 물적 토대로서 기능했던 것이다. 해방 이후, 공릉동에 나란히 붙어 있었던 경성제국대학 이공학부와 광산전문학교는 1947년 국립서울대학교 공과대학으로 통합된다. 엄밀히 말하자면, 서울공대가 일제가 남긴 ‘적의 재산, 적산敵産’을 접수하는 형태였다. 지금의 공릉 캠퍼스는 이때 지금의 모양을 갖추었다고 하겠다. 하지만 서울대학교가 경성제국대학 이공학부와 광산전문학교의 역사를 공식적으로 계승하기를 거부한다고 하더라도, 그 역사적 잔흔들은 여전히 공릉캠퍼스에 다산관, 창학관, 대륙관을 통해 서울과기대로 이어지고 있다. 왜 서울과기대가 공릉캠퍼스에 둥지를 틀게 되었는지 그 의미를 고민할 때다. 아름다운 캠퍼스 정경 속의 옛 건물을 바라보며 드는 단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