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사소개 l 공지사항 l PDF서비스 l 호별기사 l 로그인
중국 공산당 100년을 기억하며(2)
기사 승인 2021-06-06 21  |  647호 ㅣ 조회수 : 242

중국 공산당 100년을 기억하며(2)



유현정(기초교육학부 강사)



  1921년 창당 당시 당원 57명이 전부였던 이 작은 청년 정당은 끝내 중국 전역을 제패하고 새로운 국가를 건설했다. 1921년 창당부터 49년 중화인민공화국의 건국까지의 복잡한 역사적 사실들을 모두 살피기란 쉽지 않다. 여기에서는 중국 공산당이 농촌 문제를 적극적으로 해결하면서 농민의 정당으로 거듭났던 과정을 중심으로 ‘신중국新中國’ 건국의 주역이 되었던 것을 살펴보자.



  중국 공산당이 처음부터 도시가 아닌 농촌에서 노동자가 아닌 농민의 지지를 기반으로 혁명을 완수해나간다는 목표를 세웠던 것은 아니었다. 그렇게 된 데는 마르크스주의를 중국 현실에 맞춰 독창적으로 해석한 마오쩌둥이란 걸출한 지도자가 있고, 공산당이 도시에서의 근거지를 잃고 결국 내륙의 오지 옌안延安으로까지 쫓겨 갔던 사정도 있다.



  창당 직후 중국 공산당은 노동운동에 집중했으나, 군벌과 경찰의 진압을 받으면서 잠시 침체기를 맞게 되었다. 그러나 1차 국공합작 기간(1924~1927)에 공산당은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크게 성장할 수 있었다. 공산당의 지도 아래 노동운동이 급진전 했고, 농민운동도 고조되었다. 특히 후난에서는 마오쩌둥의 지도 아래 농민운동이 급진적으로 전개되었다. 대지주는 물론 중소지주의 토지까지 몰수하고 지주 권력을 대신해 농민협회가 농촌의 권력을 장악했던 것이다. 이러한 성과를 바탕으로 농민의 혁명 역량을 체감할 수 있었던 마오쩌둥은 훗날 중국 사회주의혁명을 “농촌으로부터 도시를 포위”해나가는 전략을 세울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1차 국공합작 기간에 대중사업을 통해 크게 성장한 공산당 세력은 당시 국민당의 실권자 장제스를 심각하게 위협했다. 이는 곧 국공합작의 결렬로 이어지고 말았다. 더욱이 장제스를 총사령관으로 한 국민당군은 1930년부터 1934년까지 총 다섯 차례에 걸친 포위토벌작전을 시행했다. 공산당은 결국 루이진瑞金 근거지를 포기하고 1934년 10월 15일에 탈출하기 시작했으니 이것이 그 유명한 ‘대장정大長征’이다. “정권은 총구로부터 나온다”는 그 유명한 말은 그때 공산당이 국민당 토벌작전에 쫓겨가면서 무장투쟁의 중요성을 실감하면서 나온 말이기도 하다. 그때까지 공산당에서 실권을 장악하지 못했던 마오쩌둥이 홍군과 당 중앙에서 주도적 지위를 확고히 함으로써 당권과 군사지도권을 장악하고 장정을 이끌 것이 결정되었던 쭌이遵義 회의(1935.1.15.~17)도 이 장정 중에 개최되었다.



  루이진 탈출로부터 약 1년 후인 1935년 10월 20일, 옌안 도착으로 종결된 대장정은 처음 출발 인원의 약 10%만이 살아남을 수 있었던 험난한 여정이었다. 이 옌안에서 중국 공산당은 살아남은 자들의 슬픔과 먼저 떠난 동지들의 몫만큼 더 혁명을 완수해야 한다는 사명감 속에서 혁명 역량을 재충전해야 했다.



  그러한 와중에 1937년 7월에 중일전쟁이 발발했고, 또다시 국공 양당 간에 항일을 위한 두 번째 국공합작(1937~1945)이 체결되었다. 이 중일전쟁 기간에 공산당은 더욱 성장할 수 있었는데, 지구전과 유격전을 통해 항일근거지를 수립했다. 홍군의 규모가 전쟁 초기에 비해 약 열 배 가량 성장했을 뿐 아니라 당원 또한 전쟁 초기에 4만 명에서 중일전쟁기에는 약 80만 명으로 증가했다. 공산당은 오지의 가난한 농촌에서 게릴라전과 토지개혁을 중심으로 한 대중운동을 발전시켜 항일근거지를 만들고 이를 바탕으로 세력을 키워나갈 수 있었다. 종전 후에도 새롭게 확보한 농촌 해방구에서 중국 공산당은 소작료를 25% 인하하고 부채의 이자를 15% 인하하는 정책을 채택하는 한편, 친일 악질 지주의 토지만을 몰수하여 재분배하는 토지혁명을 추진하여 농민의 이익을 대변하고자 했다.



  1945년 8월 중일전쟁 종전 이후 중국에서는 국공내전을 반대하는 국민들의 여론이 고조되었음에도 내전이 발발하고 말았다. 내전이 전면화 되자 공산당은 토지정책을 “경자유기전 耕者有其田” 원칙에 입각한 전면적 토지혁명으로 전환했다. 공산당은 모든 지주의 토지소유권을 폐지하는 <중국토지법대강>(1947.10.10.)을 공포했고, 이 <중국토지법대강>에 기초하여 토지개혁운동을 전개했다. 이는 농민들이 공산당을 지지하여 내전에 적극 참여하게 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중국공산당은 창당 28년 만에 중국 전역을 장악하여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는 데 끝내 성공했다. 1949년 10월 1일 오후 3시, 베이징의 톈안먼광장에 중국 인민 30여만 명이 모인 이날, 마오쩌둥은 톈안먼 성루에서 중화인민공화국의 성립을 선포했다. 그날 광장에는 중국공산당을 상징하는 큰 별을 노동자, 농민, 소小부르주아지, 민족民族부르주아지를 상징하는 네 개의 작은 별이 둘러싸고 있는 오성홍기五星紅旗가 휘날리고 있다. 농민의 이익을 대변하며 농촌을 기반으로 중국 사회주의혁명을 이끌고 성공했던 중국 공산당은 건국 이후에는 노동자와 도시 건설을 통한 근대 건설의 과제를 수행하게 된다.


기사 댓글 0개
  •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댓글쓰기 I 통합정보시스템, 구글, 네이버, 페이스북으로 로그인 하여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확인
욕설, 인신공격성 글은 삭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