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독자투고
김정인(문창·22)
우리는 사랑에 대해 얘기한다. 흘려듣는 음악, 함께하는 가족, 곁에 있는 연인, 웃고 떠드는 친구, 영원토록 행복하게 만들어주는 반려동물에게. 단지 두 글자로 이어진 그 단어 안에 허용될 수 있는 의미가 그토록 많을 수 있다는 사실이 생경하게 느껴지는 요즘이다.
나는 이상토록 사랑한다는 말을 두려워하는 사람이다. 사랑하게 된다는 것이 가끔은 약점으로 느껴질 때가 있다. 사랑한다는 것은 한 사람의 온 마음을 다 헤집어 놓는다. 내 인생의 전부를 가로채는 일이다. 그것을 입 밖으로 뱉을 만큼 무언가를 알게 된다는 것은 어쩌면 그 어떤 무언가가 나를 마음껏 아프게 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일이 될지도 모른다.
사랑했던 것들에 대해서 생각한다. 한때는 언제나 나를 반기는 반려동물이었다. 영원한 것은 없다고 하지만 정말 영원토록 기억하고픈 이름들이다. ‘구영이’, ‘하지’, ‘무미’, ‘양이’, ‘북극이’. 내 온종일을 다 차지하고 찰나처럼 사라진 이름들이다. 조그마한 털 뭉치. 손아귀에 쏙 들어오는 작은 존재는 이상할 정도로 금세 내 마음을 사로잡았다. 사랑한다. 내가 사랑한다는 말을 무언가에게 습관처럼 뱉을 수 있다는 것을 처음으로 안 순간들이었다. 그 작은 존재들은 결국 떠난다는 언질도 없이 하루아침에 내 곁을 떠났다. 작은 존재가 내 곁을 떠날 때, 작게 숨을 색색 쉬다가 조용히 곁을 떠났을 때. 여전히 마음에 눌러앉은 사랑한다는 말을 다 토해내지 못해 온종일 헛구역질하듯 울었다.
어느 순간엔 내 손 끝에서 탄생하는 글을 사랑했다. 하고 싶은 것을 참고 조금 더 생산적인 일을 해보라던 주변의 만류를 기억한다. 그럼에도 쓰고 싶었다. 내 손 끝에서 탄생하는 오직 세상에 단 하나뿐인 나의 이야기들을 사랑했다. 수많은 사람의 틈에 섞여 글을 쓰는 일을 선택했다. 그러나 글을 사랑하기에 매일이 상처인 순간도 있었다. 내가 바라는 결과가 내 글로서 잘 이뤄지지 않는다는 사실. 한때는 내가 어떤 심각한 순간들 속에서 할 수 있는 일이 고작 문장 몇 글자라는 사실만으로도 내게 상처일 때가 있었다.
아름다운 선율을 노래하는 아티스트를 사랑했다. 수많은 꿈을 꾸는 이들이 가득한 공연장 속 공기를 사랑했다. 그들과 함께 소리치고 외치고 발을 동동 굴리는 일을 사랑했다. 그 공간 속을 나오면, 아주 찰나에 찍어놓은 영상만 주시해도 심장이 쿵쿵 뛰었다. 내가 어느 공간, 어느 각박한 공기를 맡고 있어도 그들의 음악만 있다면 다시 나아갈 수 있었다. 그러나 내가 바란 것과 다른 그들의 생각, 일상. 그리고 한 공간 속에서 손만 뻗으면 닿을 것 같은 그들이 결국 영원토록 닿을 수 없는 먼 존재가 되어가고 있을 때조차도 내게는 아픔이 되는 순간이 있었다. 그들에 비해 한없이 초라한 나의 현실이 때로는 나를 더더욱 갉아먹기도 했다.
사랑하는 마음은 결국 미움이 따라오는 일이었다. 내가 날 사랑하는 일조차 나는 나를 미워한다는 말로 형용했다. 그럼에도 우리는 매 순간 사랑이라는 단어를 따라다닌다. 사랑하는 음악, 사랑하는 사람, 사랑하는 일, 사랑하는 공간. 우리는 모두 자각하지 못한 순간에도 알고 있다. 사랑하는 것들은 떠난다는 것을. 내가 이 순간, 이 공간에 가만히 멈춰있어도 그것들은 언젠가 서서히 내게서 멀어진다. 자꾸만 나를 할퀴고 울게 한다.
그러나 나는 살아냈다. ‘사랑해’라는 말을 ‘살아내’라고 듣는 친구가 있다. 그것이 마치 나의 사랑 같다. 나는 사랑에 비틀거리면서도 ‘사랑해’라는 말로서 살아낸다. 사랑하는 반려동물을 통해 식어가던 마음을 자꾸만 동동거리게 했고, 사랑하는 글을 통해 내 손끝으로 무언가 이뤄낸다는 꿈을 얻었다. 사랑하는 음률과 공간을 통해 하루하루 지나치는 두려움을 이겨냈다. 사랑하는 인연들은 자꾸만 나 자신을 보듬게 했다. 너무도 초라한 나조차 괜찮아, 괜찮아, 하고 두 눈을 뜨게 만든 것도 결국 나 자신을 사랑하고자 하는 마음에서였다.
사랑은 여전히 두려운 일이고, 자꾸만 감추고 싶은 약점처럼 느껴지지만. 그럼에도 사랑해, 하고 외친다. 그러므로 살아내기 위해서. 나뿐만 아니라, 내가 사랑하는 모든 것들이 살아내길 바라는 마음을 담아. 사랑해.